1930년대
웅진에서
다 지나 가고 보니 거친 흙이 한 덩이를,
한숨이 스러질 제 웃음 또한 간 곳 없네,
반천년(半千年) 오국풍진(五國風塵)이 꿈 아닌가 하노라.
조선사상(朝鮮史上)에 있어서나 전(全) 동양사(東洋史)에 있어서나 가장 흥미와 교훈이 많은 시기는 언제보담도 반도(半島)에서 삼국(三國)이 패권을 다투던 때이었다. 이것이 안으로는 조선(朝鮮)의 민족적 사회적 문화적 통일의 기운인 동시에 밖으론 동양(東洋)의 국면에 일(日), 지(支), 조(朝) 삼국이 정립(鼎立)하게 되는 시단(始端)이었다. 고구려(高句麗)의 강대를 줄이려 하는 신라(新羅)의 당세이용(唐勢利用)과 신라(新羅)의 압박을 벗어나려 하는 일본(日本)의 백제(百濟) 원호(援護)가 오합대권(五合大權)처럼 어울려서 외교적 군사적 기략(機略)의 있는 대로를 다하는 광경은 진실로 고금(古今) 초절(超絶)의 장관기관(壯觀奇觀)인데 그 중심무대(中心舞臺)가 실로 이 금강(錦江) 일조(一條)이었다. 그러나 이제 무엇이 남았는가. 쌍수산(雙樹山) 밑으로서부터, 웅진(熊津)으로, 석탄(石灘)으로, 백마강(白馬江)이 지나려가는 사십리(四十里) 장제(長堤)에 눈에 띄우는 것은 포플러 행수(行樹)뿐이었다. 누선십만(樓船十萬)과 비휴백만(豼貅百萬)의 들레고 북적어린 것이 발자국 하나이나 어디 있어!
물 아니 길으신가 들도 아니 넓으신가,
쌍수산(雙樹山) 오지랖이 이리 시원한 곳에서,
켜 묵은 답답한 일을 구태 생각하리오.
해오리 조는 곳에 모래 별로 깨끗해라,
인간의 짙은 때에 물 안 든 것 없건마는,
저 둘만 제 빛을 지녀 서로 놓지 않더라.
주석
오국풍진(五國風塵) 다섯 나라가 얽혀 일으킨 전란의 소용돌이. 백제를 둘러싸고 고구려·신라·당·왜가 다투던 정세를 이른다.
웅진(熊津) 지금의 충남 공주. 백제의 두 번째 수도로 '곰나루'라고도 한다.
쌍수산(雙樹山) 공주에 있는 산. 공산성(公山城)이 자리한 곳.
정립(鼎立) 솥의 세 발처럼 셋이 맞서 섬. 일·중·한 세 세력의 대치를 이른다.
누선십만(樓船十萬) 다락을 얹은 큰 병선 십만 척. 백제 멸망기의 대규모 수군을 과장하여 이른다.
비휴백만(豼貅百萬) 맹수처럼 용맹한 백만 군사. '비휴'는 전설의 사나운 짐승으로 용맹한 군대를 비유한다.
해오리 해오라기. 백로과의 물새.
심상·해설
백만 대군이 들끓던 옛 백제의 격전지가 이제는 거친 흙 한 덩이로 남고, 해오라기 조는 강가의 깨끗한 모래와 맑은 물만이 옛 빛을 지켜 흐르는 무상의 풍경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