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만월대에서
옛사람 일들 없어 예와 눈물 뿌렸단다,
천지(天地)도 업이거니 왕업(王業)이란 무엇이니,
석양(夕陽)의 만월대(滿月臺) 터를 웃고 지나가노라.
사람 같은 그림 속에 그림 같은 사람 모여,
공보담 빠른 눈짓 번개처럼 치고 맞던,
향진(香塵)을 아니 찾으랴 구정(毬庭) 밟고 가리라.
송악산(松嶽山) 봄 수풀에 갖은 새가 노래하고,
‘병풍(屛風)에 그린 황계(黃鷄)’ 나래 치며 울려건만,
‘연쌍비(燕雙飛)’ 한번 간 넋은 돌아 언제 오는고.
주석
만월대(滿月臺) 개성 송악산 기슭에 있던 고려 왕궁터. 고려 멸망 뒤 폐허로 남아 회고의 명소가 되었다.
왕업(王業) 임금이 나라를 다스려 이룬 대업. 한 왕조의 치적.
향진(香塵) 향기로운 티끌. 화려했던 옛 영화의 자취, 미인들이 남긴 향내 어린 흔적을 이른다.
구정(毬庭) 격구(擊毬, 말 타고 공을 치는 놀이)를 하던 마당. 고려 때 단오 등에 성대히 열렸다.
송악산(松嶽山) 개성 북쪽의 산. 고려 왕궁을 등진 진산(鎭山)이다.
병풍에 그린 황계(黃鷄) 병풍에 그린 누런 닭. 그림 속 닭이 운다는 것은 곧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비유한다. 황계사(黃鷄詞)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연쌍비(燕雙飛) 고려 우왕이 총애한 기생의 이름. 한번 떠난 넋이 돌아오지 않듯, 사라진 옛 영화를 상징한다.
심상·해설
석양에 잠긴 고려 왕궁터 만월대를 거닐며 흘러간 영화를 곱씹는다. 격구장의 향기로운 자취도, 병풍 속 닭의 울음도 부질없고, 한번 떠난 넋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 무상함이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