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1910년대
꼿두고
나는 꽃을 즐겨 맞노라,
그러나 그의 아리따운 태도를 보고 눈이
얼이며
그의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코가 반하여
정신없이 그를 즐겨 맞음이 아니라,
다만 칼날같은 북풍을 더운 기운으로써
인정없는 살기를 깊은 사랑으로써
대신하여 바꾸어
뼈가 저린 얼음 밑에 눌리고 피도 어릴 눈구
덩이에 파묻혀 있던
억만 목숨을 건지고 집어내어 다시 살리는
나는 그를 즐겨 맞노라.
나는 꽃을 즐겨 보노라,
그러나 그의 평화 기운 머금은 웃는 얼굴 홀
리며
그의 부귀기상 나타낸 성한 모양 탐하야
주저없이 그를 즐겨 봄이 아니라.
다만 겉모양의 고운 것 매양 실상이 적고
처음 서슬 장한 것 대개 뒤없는 중
오직 혼자 특별히
약간 영화 구안치도 아니코 허다 마장 겪으면
도 굽히지 않고
억만 목숨을 만들고 늘여내어 길이 전할 바
씨열매를 보육함으로
나는 그를 즐겨 보노라.
주석
부귀기상(富貴氣象) 부유하고 귀한 기색과 풍채. 화려하고 당당한 겉모습.
마장(魔障) 일을 방해하는 마(魔)의 장애. 갖은 시련과 훼방.
구안(苟安) 한때의 편안함을 구차하게 탐함. 눈앞의 안일에 안주함.
《소년(少年)》 최남선이 1908년 창간한 한국 최초의 근대 잡지. 이 시의 발표 지면.
심상·해설
꽃을 그저 아름다운 자태나 향기 때문이 아니라, 칼바람과 얼음 밑에 묻힌 억만 목숨을 되살리고 씨열매를 길러 내는 그 생명력 때문에 사랑한다고 노래한다. 겉모양보다 본질을 보는 굳건한 신념이 봄의 기운과 함께 솟는다.
낭독 지시
Style: 다짐을 펴듯 또박또박 힘 있게, 두 연을 같은 결로 운율 살려, ‘즐겨 맞이한다·바라본다’ 끝맺음마다 한 박 눌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