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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츠의 시
1920년대

예이츠의 시

김억 · 1920년대
아름다운 온갖 것은 가고 말아라. 물결처럼 흘러가고 올 줄 몰라라. ―예이츠 이리도 다사롭고 이리도 고운 시를 모아서는 바람결 같이 떠도는 나의 벗 고경상(高敬相) 형(兄)에게 드리노라. 만일에 내가 광명(光明)의 황금(黃金)과 백금(白金)으로 짜낸 하늘의 수(繡) 놓은 옷, 날과 밤의, 또는 저녁의 푸르름과 어스름함, 그리하고 어두움의 물들인 옷을 가졌을지면, 그대의 발아래 펴 놓으련만, 아아 나는 가난하여 소유(所有)란 꿈밖에 없노라, 그대의 발아래 내 꿈을 펴놓으니, 내 꿈 위를 밟으시려거든 그대여, 곱게도 가만히 밟으라. 나는 들었노라, 세고(世苦)에 늙은이의 말이, '세상(世上)의 모든 물건(物件)은 다 변(變)하여 우리도 한 사람 두 사람 가고 못 와라.' 고양이의 톱 같은 늙은이의 손, 무릎은 꾸부러진 가시나무인 듯 냇물가에 어리운. 나는 들었노라, 세고(世苦)에 늙은이의 말이 '아름다운 온갖 것은 가고 말아라, 물결처럼 흘러가고, 올 줄 몰라라.' 버드나무의 동산 가에서 나는 내 님과 만나었노라 내 님은 눈인 듯 하이얀 적은 발로 버드나무 동산을 지나갔어라 나무에 돋아나는 잎과도 같이 사랑은 스러지기 쉽다고 내 님은 말하여라 그러나 나는 어리고 어리석었노라 이리하여 내 님의 말을 듣지 않았노라. 강(江)물 가에 누웠는 벌판에 나는 내 님과 섰었노라 내 님은 눈인 듯 하이얀 그 손을 나의 숙인 어깨에 얹었어라 언덕 가에 자라는 풀과도 같이 목숨은 스러지기 쉽다고 내 님은 말하여라 그러나 나는 어리고 어리석었노라 이리하여 지금(只今) 내 눈에는 추회(追懷)의 눈물이 흘러라. 가을은 우리를 사랑하는 긴 잎 위에, 보릿단 속에 숨어있는 쥐 위에도 와서, 우리의 위에 있는 로완나무 잎도 누르고, 들가의 젖은 딸기 잎도 누른 빛이러라. 이지러지는 사랑의 '때'는 내 몸을 둘러 쌌어라, 아아 설어라, 곤비(困憊)한 나의 영(靈)이여, 열정(熱情)의 때가 가기 전(前)에 키스와 눈물을, 나는 그대의 숙인 이마에 남기고 가려노라. 푸릇한 눈썹, 고요한 손과, 검은 머리털, 이러한 아름다운 내 벗이 있었어라. 그리하고 지나간 옛날의 절망(絶望)이, 마지막에는 '사랑'일 줄로 생각하였노라. 하루는 그 아낙네가 내 맘속을 엿보고 자기의 모양이 아직도 내 가슴에 있음을 보고는 그 아낙네는 울면서 떠나갔어라. 지금(只今)은 그대가 비록 행운(幸運)을 만나 여러 사람의 혀끝에 오르내리며, 새로운 벗이 끊이지 않고 그대를 칭찬하나, 무정(無情)스럽게도 말아라, 교만도 말아라, 그러지를 말고서, 옛 벗을 생각하여라, 오래지 아니하여, 홍수(洪水)의 설은 '때'는 와서 그대의 얼굴엔 아름다운 빛이 없어지리라. 그때, 아아 그리될 때야 옛 벗을 제(除)하고는 다른 사람이 다 잊고 마리라. 술은 입으로 들어가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가나니, 사람아, 늙어서 죽기 전(前)에 반드시 진리(眞理)로 알아둘 것은 이것이러라. 나는 술잔을 입에 대이고 그대를 바라보며, 탄식하노라.

주석

예이츠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 B. Yeats, 1865~1939). 이 묶음은 그의 여러 시편을 김억이 옮긴 것으로, 「하늘의 천」, 「버들 정원 아래로」 등이 포함된다.

고경상(高敬相) 김억의 벗으로, 이 역시집의 헌사를 받은 인물.

하늘의 수(繡) 놓은 옷 예이츠의 명시 「He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하늘의 천을 소망하며)」을 옮긴 대목. '내 꿈을 밟으니 사뿐히 밟으라'는 구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세고(世苦)에 늙은이 세상의 고생에 늙은 사람. 예이츠 「The Old Men Admiring Themselves in the Water」 계열의 시상이다.

로완나무 마가목(rowan). 가을에 붉은 열매가 달리는 나무.

추회(追懷) 지난 일을 돌이켜 그리며 뉘우침.

곤비(困憊) 몹시 지치고 고단함.

술은 입으로 사랑은 눈으로 예이츠의 「A Drinking Song(술 노래)」을 옮긴 마지막 연이다.

심상·해설

꿈을 옷처럼 발아래 펴 사뿐히 밟아 달라 청하는 장면에서, 버들 동산의 옛사랑과 누렇게 물든 가을 잎을 지나, 모든 아름다움은 물결처럼 흘러가 버린다는 무상의 정조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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