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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
1930년대

청명

김영랑 · 1930년대
호르 호르르 호르르르 가을 아침 취어진 청명(淸明)을 마시며 거닐면 수풀이 호르르 벌레가 호르르르 청명은 내 머릿속 가슴속을 젖어들어 발끝 손끝으로 새어나가나니 온 살결 터럭끝은 모두 눈이요 입이라 나는 수풀의 정을 알수 있고 벌레의 예지(叡智)를 알수 있다 그리하여 나도 이 아침 청명의 가장 곱지 못한 노래꾼이 된다 수풀과 벌레는 자고 깨인 어린애라 밤 새워 빨고도 이슬은 남았다 남았거든 나를 주라 나는 이 청명에도 주리나니 방에 문을 달고 벽을 향해 숨 쉬지 않았느뇨 햇발이 처음 쏟아지면 청명은 갑작히 으리으리한 관(冠)을 쓰고 토르록 실으르 동백 한알은 빠지나니 오! 그 빛남 그 고요함 간밤에 하늘을 쫓긴 별살의 흐름이 저러했다 왼 소리의 앞소리요 왼 빛깔의 비롯이라 이 청명에 폭 취어진 내 마음 감각의 시원한 골에 돋은 한낱 풀잎이라 평생을 이슬밑에 자리잡은 한낱 벌레로

주석

청명(淸明) 맑고 밝음. 여기서는 가을 아침의 맑디맑은 대기와 그 기운을 가리킨다.

예지(叡智)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뛰어난 슬기와 지혜.

별살 별에서 비치는 빛살. 별빛의 줄기.

왼 '온', 곧 전부의·온갖. '왼 소리=온 소리', '왼 빛갈=온 빛깔'.

비롯 비롯됨. 시초, 시작.

심상·해설

호르르 울리는 수풀과 벌레 소리 속에 온몸으로 가을 아침의 맑은 기운을 들이마시고, 햇발에 동백 한 알이 떨어지는 그 빛남과 고요함에 한낱 풀잎이 된 듯한 황홀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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