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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가을
1920년대

그림 그리는 가을

변영로 · 1920년대
가을은 모든 것을 또렷이 그린다 세상 없어도 수묵[水墨]을 쓰지 않어 ! 행여나 퍼질까봐 번—질까봐 가늘게 가늘게 실보다 더 가늘게 군 점 군 혹 군 티 하나 있을사라 맑고 깨끗이만 그린다—그 에칭바늘로 ! 지붕과 추녀끝도 더 상큼히 그리지만 가뜩이 또렷한 산모롱이에 손을 더 대 ! 그리곤 뒤하늘과 맞닿을까 보아 사이를 떼이노라 빛의 선을 두르나니 무릉도[武陵圖] 그린 안견[安堅]이나 그 솜씨 따를까 사람의 손끝으론 그 치밀[緻密] 못 좇으리.

주석

수묵(水墨) 먹의 짙고 옅음만으로 번지듯 그리는 동양화 기법. 가을 하늘은 번짐이 없는 또렷한 선의 그림이라 수묵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에칭바늘 동판화(에칭)에서 금속판에 가는 선을 새기는 뾰족한 바늘. 가을의 맑고 섬세한 윤곽을 새기는 도구에 빗댔다.

산모롱이 산모퉁이의 휘어 도는 곳.

무릉도(武陵圖)·안견(安堅) 안견은 조선 세종 때의 대화가로,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몽유도원도」가 유명하다. '무릉도'는 그 무릉도원을 그린 그림을 가리키며, 가을의 정밀한 묘사를 명화에 견준 것이다.

심상·해설

번짐 하나 없이 에칭바늘로 새기듯 지붕과 추녀, 산모롱이의 윤곽까지 또렷이 그려 내는 맑은 가을 풍경을, 안견의 명화에 견주어 바라보는 감각이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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