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태극선
이 아이는 고무뽈을 따러
흰 산양이 서로 부르는 푸른 잔디 우로 달리는지도
모른다.
이 아이는 범나비 뒤를 그리여
소스라치게 위태한 절벽 갓을 내닫는지도 모른다.
이 아이는 내처 날개가 돋혀
꽃잠자리 제자를 슨 하늘로 도는지도 모른다.
(이 아이가 내 무릎 우에 누온 것이 아니라)
새와 꽃, 인형, 납병정, 기관차들을 거나리고
모래밭과 바다, 달과 별 사이로
다리 긴 왕자처럼 다니는 것이려니,
(나도 일찍이, 점두록 흐르는 강가에 이 아이를
뜻도 아니한 시름에 겨워
풀피리만 찢은 일이 있다)
이 아이의 비단결 숨소리를 보라.
이 아이의 씩씩하고도 보드라운 모습을 보라.
이 아이 입술에 깃들인 박꽃 웃음을 보라.
(나는, 쌀, 돈셈, 지붕 샐 것이 문득 마음 키인다)
반딧불 하릿하게 날고
지렁이 기름불만치 우는 밤,
모와드는 훗훗한 바람에
슬프지도 않은 태극선 자루가 나부끼다.
주석
태극선(太極扇) 한가운데에 태극무늬를 그린 둥근 부채. 여기서는 잠든 아이 곁에서 부치는 부채.
고무뽈 고무공. '뽈'은 영어 ball의 옛 표기.
범나비 호랑나비. 날개에 호랑이 무늬 같은 점이 있는 큰 나비.
제자(梯子)를 슨 사다리처럼 줄지어 늘어선. 잠자리들이 층층이 떼 지어 나는 모양.
납병정 납으로 만든 장난감 병정.
점두록 날이 저물도록, 종일토록의 옛말.
하릿하게 흐릿하게, 또렷하지 않고 어슴푸레하게.
훗훗한 후끈하게 끼치는 더운 기운이 있는.
심상·해설
무릎 위에 잠든 아이가 꿈속에서는 잔디와 절벽, 별 사이를 다리 긴 왕자처럼 누비고, 그 비단결 숨소리와 박꽃 같은 웃음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살림 걱정을 잠시 누른 채 부채질하는 여름밤의 정겨움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