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꽃과 벗
석벽 깎아지른
안돌이 지돌이,
한나잘 기고 돌았기
이제 다시 아슬아슬 하고나.
일곱 걸음 안에
벗은, 호흡이 모자라
바위 잡고 쉬며 쉬며 오를 제,
산꽃을 따,
나의 머리며 옷깃을 꾸미기에,
오히려 바뻤다.
나는 번인처럼 붉은 꽃을 쓰고,
약하야 다시 위엄스런 벗을
산길에 따르기 한결 즐거웠다.
새소리 끊인 곳,
흰돌 이마에 회돌아 서는 다람쥐 꼬리로
가을이 짙음을 보았고,
가까운듯 폭포가 하잔히 울고.
메아리 소리 속에
돌아져 오는
벗의 부름이 더욱 고았다.
삽시 엄습해 오는
빗낯을 피하야,
짐승이 버리고 간 석굴을 찾어들어,
우리는 떨며 주림을 의논하였다.
백화 가지 건너
짙푸르러 찡그린 먼 물이 오르자,
꽈리같이 붉은 해가 잠기고,
이제 별과 꽃 사이
길이 끊어진 곳에
불을 피고 누웠다.
낙타털 케트에
구기인 채
벗은 이내 나비같이 잠들고,
높이 구름 우에 올라,
나릇이 잡힌 벗이 도로혀
안해같이 여쁘기에,
눈 뜨고 지키기 싫지 않었다.
주석
안돌이 지돌이 벼랑길에서 바위를 안고 도는 곳(안돌이)과 등지고 도는 곳(지돌이). 험준한 산길을 이르는 말.
한나잘 한나절. 하루의 반.
번인 번인(蕃人). 미개한 사람, 야만인. 여기서는 붉은 꽃을 머리에 꽂은 자신을 익살스럽게 빗댄 표현.
하잔히 하잔하다=한가하고 고요하다. '한가로이, 무심히'의 뜻.
빗낯 빗발, 빗방울이 들이치는 모양.
백화(白樺) 자작나무.
케트 영어 blanket의 일본식 발음 '게트(ケット)'. 담요.
나릇 수염의 옛말. '나릇이 잡히다'는 수염이 거뭇하게 돋은 모양.
안해 아내의 옛 표기.
심상·해설
가을 산을 함께 오르며 산꽃으로 서로를 꾸미고, 붉은 해가 잠긴 뒤 석굴에 모닥불을 피워 잠든 벗을 지켜보는—험준한 등반 속에 깃든 따뜻한 우정의 정경이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