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여수
여수에 잠겼을 때, 나에게는 쬐그만 희망도 숨어버린다.
요령처럼 흔들리는 슬픈 마음이여!
요지경 속으로 나오는 좁은 세상에 이상스러운 세월들
나는 추억이 무성한 숲속에 섰다.
요지경을 메고 다니는 늙은 장돌뱅이의 고달픈 주막꿈처럼
누덕누덕이 기워진 때묻은 추억,
신뢰할 만한 현실은 어디에 있느냐!
나는 시정배와 같이 현실을 모르며 아는 것처럼 믿고 있었다.
괴로운 행려 속 외로이 쉬일 때이면
달팽이 깍질 틈에서 문밖을 내다보는 얄미운 노스타르자
너무나, 너무나, 뼈없는 마음으로
오 늬는 무슨 두 뿔따구를 휘저어보는 것이냐!
주석
여수(旅愁) 객지에서 느끼는 나그네의 시름과 쓸쓸함.
요령(搖鈴) 흔들어 소리 내는 작은 종. 상여 앞이나 의식에서 흔들던 방울로, 슬프게 흔들리는 마음을 빗댐.
요지경(瑤池鏡) 확대경 너머로 갖가지 그림이 돌아가도록 만든 구경거리 상자. 변화무쌍하고 알 수 없는 세상을 비유함.
장돌뱅이 이 장 저 장으로 떠돌며 물건을 파는 장수. 떠도는 삶의 표상.
시정배(市井輩) 장터·저잣거리를 드나드는 보통 사람들. 흔히 식견 없는 무리를 낮잡아 이르는 말.
행려(行旅) 객지를 떠돌아다님, 또는 그런 나그넷길.
노스타르자 노스탤지어(nostalgia), 곧 향수·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음차한 외래어.
심상·해설
요지경 속처럼 종잡을 수 없는 세상을 떠돌며, 누더기처럼 기워진 추억과 달팽이 껍질 밖으로 더듬이를 내미는 향수에 시달리는 나그네의 막막하고 쓸쓸한 내면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