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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유기
1930년대

항주유기

심훈 · 1930년대
항주(杭州)는 나의 제이(第二)의 고향(故鄕)이다. 아직 어린 나이의 가장 로맨틱하던 시절(時節)은 두 해(星霜)나 서자호(西子湖)와 전당강변(錢塘江邊)에 머물러 지냈다. 벌써 십 년(十年)이나 되는 옛날이언만 그 맑고 아름다운 산천(山川)이 꿈결에도 잊히지 않고 그곳의 단정하고 고운(端麗) 풍물(風物)이 달콤한 애상(哀傷)과 함께 지금도 머릿속에 첫자리를 잡고 있다. 더구나 그때에 유배(流配)나 당(當)한 듯이 호숫가(湖畔)에 거니시던(逍遙) 석오(石吾), 성재(省齋) 두 분 선생(先生)님과 고생(苦生)을 같이 하며 허심탄회(虛心坦懷)로 사귀던(交遊) 엄일파(嚴一波), 염온동(廉溫東), 정진국(鄭鎭國) 등(等) 여러 벗(諸友)이 몹시 그립다. 떠돌이 신세(流浪民의 身)―, 하루살이(蜉蝣)와 같은지라 한번 동서(東西)로 흩어진 뒤에는 소식(雁信)조차 나누지 못하니 끊임없는(綿綿) 정회(情懷)가 철 따라(節季) 간절(懇切)하다. 이제 추억의 실마리를 붙잡고 학창 시절(學窓時代)에 끄적여 두었던 묵은 수첩(手帖)의 먼지를 털어 본다. 그러나 항주(杭州)와는 인연(因緣)이 깊던 백낙천(白樂天), 소동파(蘇東坡) 같은 시인(詩人)의 이름난 작품(名篇)을 끌어다 견주지(例憑) 못하니 생색(生色)이 적고 또 고문(古文)을 두루 익힌(涉歷) 바도 없어 다만 시조체(時調體)로 십여 수(十餘首)를 벌여 볼 뿐이다.

주석

서자호(西子湖) 중국 항주의 명승지 서호(西湖). 미인 서시(西施)에 빗대어 서자호라고도 부름.

전당강(錢塘江) 항주를 흐르는 강. 거대한 해일(전당대조)로 유명함.

석오(石吾) 독립운동가 이동녕(李東寧)의 호. 상해 임시정부 요인.

성재(省齋) 독립운동가 이시영(李始榮)의 호. 상해 임시정부 요인.

부유(蜉蝣) 하루살이. 덧없고 짧은 인생, 정처 없는 신세를 비유하는 말.

안신(雁信) 기러기가 전한다는 편지, 곧 소식이나 서신을 이르는 말.

백낙천(白樂天)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항주 자사를 지내며 서호에 백제(白堤)를 쌓았다고 전함.

소동파(蘇東坡) 송나라 시인 소식(蘇軾). 항주 통판을 지내며 서호에 소제(蘇堤)를 쌓았다고 전함.

심상·해설

제2의 고향 항주의 맑은 산천과 서호 물가를 거닐던 옛 스승·벗들을 떠올리며, 십 년 전 묵은 수첩의 먼지를 털어 추억을 더듬는 그리움 어린 서문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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