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성씨보
내 성은 오씨(吳氏).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워 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일청인(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 숭배(大國崇拜)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
해변 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구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을랴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주석
성씨보 한 가문의 계보를 기록한 책. 곧 족보(族譜).
일청인(一淸人) 한 사람의 청(淸)나라 사람. 화자의 조상이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적힌 족보 내용을 가리킴.
대국 숭배(大國崇拜) 큰 나라, 곧 중국을 떠받드는 사대(事大) 의식. 조상을 청나라 사람으로 적은 허위를 풍자함.
진실이가 '진짜 양반 집안(진사·생원 등 벼슬한 양반)'의 뜻으로 쓰인 말. '상놈'과 대비됨.
수퉁하구나 '수퉁하다'는 둔하고 무디다는 뜻.
심상·해설
바닷가로 떠밀려 온 빈 소라 껍데기처럼, 자신을 짓누르는 허위의 족보를 무거운 껍데기로 느끼며 낡은 관습을 벗어던지려는 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