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2월 초하룻날
이월(二月) 초하루는 머슴의 설날이라 한다. 남의 논 마지기를 얻어 하거나 밥술 먹는 집의 머슴 노릇을 해서 농노(農奴)의 생활(生活)을 하는 그네들이 일년(一年)에 한 번 먹고 마시고 마음껏 뛰노는 날이 이 이월 초하루다.
아침부터 밤이 이슥하도록 아래 윗마을에서 징, 꽹과리, 새납, 장고 같은 풍물을 불며 두드리는 소리가 끊일 사이 없이 들린다. 그네들이 두레를 노는 광경(光景)은 「상록수(常綠樹)」 중(中)에도 묘사(描寫)한 바 있어 생략(略)하지만, 아직도 눈이 풀풀 흩날리는 그믐밤, 고등(孤燈) 아래서 종이 위에 「펜」을 달리면서, 바람결에 가까이 또는 꿈속같이 은은히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들으면 미상불 향토적(鄕土的) 정서(情緖)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낮에 그네들이 뛰놀던 정경(情景)을 눈앞에 그려 보면 다시금 우울증(憂鬱症)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억제(抑制)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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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궁벽(窮僻)한 해변(海邊) 산촌(山村)에 수간(數間) 모옥(茅屋)을 짓고 죄(罪) 없는 귀양살이를 하게 된 후(後)로 다만 고적(孤寂)과 벗을 삼고 지내기 이미 만(滿) 삼년(三年)이나 되었다. 비록 「구아조찰난위청(嘔啞嘲哳難爲聽)」일망정, 산가(山歌)와 촌적(村笛)이나마 그리워서, 두렛군들과 어울려 다니며 막걸리 사발도 얻어먹고, 춤추는 흉내도 내어 보았다.
첫해에는 누더기를 벗지 못한 머슴꾼들이 헌털뱅이 패랭이를 쓰고 곤댓짓을 해서 긴 상모를 돌리며, 호적(胡笛) 가락 꽹과리 장단(長短)에 요두전목(搖頭轉目)을 하는 것이며, 신명이 나서 개구리처럼 뛰노는 것이 남양(南洋)의 토인부락(土人部落)으로나 들어찰 듯 야만인종(野蠻人種)의 놀음같이 보였다.
그러더니 그 다음에는 두레는 농촌(農村) 오락(娛樂)으로 없지 못할 것같이 생각되었다. 좀 더 규모(規模)를 크게 하고 통제(統制) 있게 놀도록 지도(指導) 장려(獎勵)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금년(今年)에 와서는 두레를 보는 관점(觀點)이 변(變)해졌다. 조석(朝夕)으로 만나고 사이좋게 지내던 아래 위 동리(洞里)가 합(合)하기만 하면 반드시 시비(是非)가 나고, 시비 끝에는 싸움으로 끝을 맺는다. 그것은 유식(有識) 무식(無識) 간(間)에 두세 사람만 모여도 자그락거리고 합심(合心) 단결(團結)이 되지 못하는 조선(朝鮮)놈의 본색(本色)이라, 씨알머리가 밉기도 하려니와, 한편으로 돌이켜 생각하면 가엾기가 짝이 없다. 배를 실컷 불린다는 날 집집으로 돌아다니며 얻어먹은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두부쪽 콩나물 대가리에 돼지 죽같이 텁텁한 막걸리뿐이다.
평소(平素)부터 영양(營養) 부족(不足)에 걸린 그네들은 그나마 걸터듬을 해서 그 술을 마시고, 걸신이 들린 것처럼 그 거친 음식(飮食)을 어귀어귀 걷어 넣는다. 그러고는 온종일(終日) 두드리고 뛰놀면서 온 동네(洞內)를 돌아다니고 나니, 「알코올」 기운은 그네들의 창자(膓子)와 단순(單純)한 신경(神經)을 자극(刺戟)시켜서, 악성(惡性)으로 취(醉)하게 한다. 곤죽이 되도록 취하고 나니 대수롭지 않은 일에 충돌(衝突)이 되고 평소(平素)의 불평(不平)이 폭발(爆發)되면 유혈(流血)의 참극(慘劇)까지도 연출(演出)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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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는 주막(酒幕) 거리에서 그런 광경(光景)을 보다 못해서 달려가 뜯어말렸다. 몇 %밖에 아니 되는 「알코올」 기운을 이기지 못해서 두 눈이 만경을 한 것처럼 개개 풀렸는데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픽픽 쓰러지는 그네들의 육체(肉體)는 흡사(恰似)히 말라빠진 북어(北魚)를 물에다 불려 놓은 것 같다.
그러나 그네들의 혈색(血色) 없는 입은 「우리에게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의 영양(營養)을 달라!」고 부르짖을 줄 모른다. 자기(自己)네의 빈곤(貧困)과 무지(無智)를 아직도 팔자(八字) 탓으로만 돌릴 뿐.
오오 형해(形骸)만 남은 백만(百萬) 천만(千萬)의 숙명론자(宿命論者)여! 그대들은 언제까지나 그 숙명(宿命)을 짊어지고 살려는가? 중추신경(中樞神經)이 물러앉은 채로 그 누구를 위(爲)하여 대대(代代) 손손(孫孫)이 이 땅의 두더지 노릇을 하려는가?
주석
구아조찰난위청(嘔啞嘲哳難爲聽) 백거이의 '비파행(琵琶行)'에 나오는 구절로, '지껄이고 조잘대어 차마 듣기 어렵다'는 뜻. 시골의 거친 노랫소리를 빗댄 표현이다.
상록수(常綠樹) 심훈이 1935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농촌 계몽을 다루며, 본문에서 두레를 묘사한 작품으로 언급된다.
두레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해 마을 단위로 조직하던 협동 조직, 또는 그때 벌이던 농악·놀이판.
요두전목(搖頭轉目) 머리를 흔들고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는 뜻으로, 농악판에서 신명 나게 노는 모습을 가리킨다.
새납 태평소(호적, 날라리)를 이르는 말.
패랭이 댓개비로 엮어 만든 차양 넓은 모자. 천한 신분이나 상인이 쓰던 것이다.
수간 모옥(數間 茅屋) 몇 칸 안 되는 작은 초가집.
심상·해설
눈 흩날리는 그믐밤, 멀리서 들려오는 농악 소리에 향수에 젖다가도 굶주린 채 술에 취해 싸우는 농민들의 비참한 모습이 떠오른다. 가난과 숙명에 짓눌린 식민지 농촌을 향한 작가의 비통한 외침이 사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