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광란의 꿈
불어라, 불어!
하늘 꼭대기에서
내리질리는 하늬바람,
땅덩이 복판에 자루를 박고
모든 것을 휩싸서 핑핑 돌려라.
머릿속에 맷돌이 돌듯이
세상은 마지막이다, 불어 오너라.
쏟아져라, 쏟아져!
바다가 거꾸로 흐르듯
폭포수(瀑布水) 같은 굵은 빗발이
쉴새 없이 기울여 쏟아져서
사람의 새끼가 짓밟은
땅 위의 모든 것을
부신듯이 씻어 버려라.
번갯불이 번쩍
으지끈 뚜욱 따악
벼락 불똥이 튀어
뾰족집을 후려갈기고
우상(偶像), 동상(銅像)을 자빠뜨리고
선정비(善政碑), 송덕비(頌德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닥치는대로 깨뜨려서
모든 거룩하다는 것 위에
벼락불의 세례(洗禮)를 내려라.
지진(地震)이다, 지진(地震), 대지진(大地震)이다!
나무뿌리가 하늘로 솟고
바윗덩이가 굴러 내린다.
지심(地心)에서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라
지구(地球)는 두 쪽에 갈라지고
모든 것은 거꾸로 섰다, 뒤집혀졌다.
불이야 불이야!
분(粉) 바른 계집의 얼굴을 그스르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조동아리를 지져 놓아라!
길로 쌓인 인류(人類)의 역사(歷史)를
첫페이지부터 살라 버리고
천만권(千萬卷) 거짓말의 기록(記錄)을
모조리 깡그리 태워 버려라.
우루루, 우루루!
집채가 넘어가고 산(山)이 무너진다.
십육억(十六億) 사람의 씨알들이
악머구리 끓듯한다, 아우성을 친다.
사람은 이빨을 갈며
사람의 고기를 물어 뜯고
뼈다귀를 다투어 깨무는
주린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
해골(骸骨)을 쪼아 먹는 까마귀의 떼울음!
불길이 훨훨 날으며
온 지구(地球)를 둘러쌌다,
새빨간 혀 끝이 하늘을 핥는다
모든 것은 죽어 버렸다,
영원(永遠)히 영원(永遠)히 죽어 버렸다,
명예(名譽)도, 욕망(慾望)도 권력(權力)도 야만(野蠻)도 문명(文明)도……
바람소리 빗소리!
해가 떨어지고 별은 흩어지며
땅이 울고 바다가 끓는다.
모든 것은 원소(元素)로 돌아가고
남은 것이란 희멀건 공간(空間) 뿐이다,
오오 이제까지의 인류(人類)는 멸망(滅亡)하였다!
오오 오늘까지의 우주(宇宙)는 개벽(開闢)하고 말았다!
주석
하늬바람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가을바람을 이르기도 한다.
선정비(善政碑)·송덕비(頌德碑)·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벼슬아치의 선정과 덕을 기리고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세운 비석들. 시인은 이를 권력자를 떠받든 거짓 기념물로 보아 파괴의 대상으로 삼는다.
지심(地心) 땅의 한가운데, 곧 지구의 중심.
악머구리 잘 우는 참개구리. '악머구리 끓듯'은 많은 것이 한데 모여 시끄럽게 떠드는 모양을 이른다.
개벽(開闢) 세상이 처음으로 생겨 열림. 여기서는 낡은 세계가 멸망하고 새 세계가 열린다는 뜻으로 쓰였다.
심상·해설
바람·폭우·벼락·지진·대화재가 한꺼번에 몰아쳐 우상과 거짓 기념비, 낡은 역사를 깡그리 태우고, 잿더미 위에 새 우주가 열리기를 바라는 묵시록적 파괴의 환상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