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박군의 얼굴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朴君)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콜병에 담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못해 해면(海綿) 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
두개골(頭蓋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果然) 자네의 얼굴이던가?
쇠사슬에 네 몸이 얽히기 전(前)까지도
사나이다운 검붉은 육색(肉色)에
양미간(兩眉間)에는 가까이 못할 위엄(威嚴)이 떠돌았고
침묵(沈默)에 잠긴 입은 한번 벌리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魅力)이 있었더니라.
사년(四年)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사람의 박(朴)은
교수대(絞首臺) 곁에서 목숨을 생(生)으로 말리고 있고
C사(社)에 마주 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사람의 박(朴)은
모진 매에 창자(腸子)가 꿰어져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朴)은
음습(陰濕)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上海)의 깊은밤
어느 지하실(地下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朴君)은
눈을 뜬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獄門)을 나섰구나.
박(朴)아 박군(朴君)아 ××아!
사랑하는 네 아내가 너의 잔해(殘骸)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同志)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앙물고 하늘을 저주(詛呪)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表情)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朴君)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
너와 같이 모든 ×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심장(心臟)의 고동(鼓動)이 끊칠 때까지.
주석
박군(朴君) 심훈의 벗이자 동지였던 박헌영(朴憲永)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폐인이 되어 출옥한 모습을 보고 쓴 시이다.
해면(海綿) 스펀지. 본래는 바다에 사는 해면동물의 뼈대로, 푸석푸석하게 부풀어 오른 모양을 비유한다.
육색(肉色) 살빛. 살갗의 빛깔.
벤또 도시락을 뜻하는 일본어(べんとう). 일제강점기에 널리 쓰이던 말이다.
C사(社) 필자가 박군과 함께 일하던 신문사나 언론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검열을 의식해 머리글자만 적었다.
상해(上海) 중국 상하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거점으로, 임시정부가 있던 곳이다.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同害報復)의 율법(『구약성경』 출애굽기 등)에서 온 표현. 당한 만큼 그대로 갚겠다는 복수의 다짐이다.
××·× 일제의 검열을 피하려고 '동지', '원수' 등 민감한 낱말을 글자 대신 복자(伏字) 부호로 가린 것이다.
심상·해설
고문으로 폐인이 되어 출옥한 벗의 일그러진 얼굴 앞에서, 죽거나 망가진 동지들을 떠올리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겠다고 이를 악무는 분노와 복수의 다짐이 끓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