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만가
궂은 비 줄줄이 내리는 황혼(黃昏)의 거리를
우리들은 동지(同志)의 관(棺)을 메고 나간다
만장(輓章)도 명정(銘旌)도 세우지 못하고
수의(襚衣)조차 못입힌 시체(屍體)를 어깨에 얹고
엊그제 떠메어 내오던 옥문(獄門)을 지나
철벅철벅 말없이 무학재를 넘는다
비는 퍼붓듯 쏟아지고 날은 더욱 저물어
가등(街燈)은 귀화(鬼火)같이 껌벅이는데
동지(同志)들은 옷을 벗어 관 위에 덮는다.
평생(平生)을 헐벗던 알몸이 추울상 싶어
얇다란 널조각에 비가 새들지나 않을까하여
단거리 옷을 벗어 겹겹이 덮어준다
(이하 6행은 일본 총독부 검열로 잘려져 나감)
동지(同志)들은 여전(如前)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채 저벅저벅 걸어간다.
친척(親戚)도 애인(愛人)도 따르는 이 없어도
저승길까지 지긋지긋 미행이 붙어서
조가(弔歌)도 부르지 못하는 산 송장들은
관(棺)을 메고 철벅철벅 무학재를 넘는다
주석
만가(輓歌) 상여를 메고 갈 때 부르는 노래. 죽은 이를 애도하는 노래를 통틀어 이른다.
만장(輓章) 죽은 이를 애도하여 지은 글을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처럼 만든 것. 장례 행렬에서 들고 간다.
명정(銘旌) 죽은 이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어 상여 앞에 들고 가는 붉은 깃발.
수의(襚衣)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
무학재 서울 서대문 밖 무악재(母岳재). 서대문형무소에서 가까워, 옥에서 죽어 나온 시신을 메고 넘던 고개로 그려진다.
귀화(鬼火) 도깨비불. 밤에 묘지나 축축한 땅에서 인광이 번쩍이는 현상.
단거리 옷 갈아입을 것 없이 단 한 벌뿐인 옷. 가진 것이라곤 입은 옷 한 벌밖에 없음을 뜻한다.
산 송장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 감시와 억압 속에 산 채로 죽어 가는 처지를 이른다.
심상·해설
궂은비 쏟아지는 황혼, 만장도 수의도 없이 옥에서 죽어 나온 동지의 관을 메고 제 옷을 벗어 덮어 주며 말없이 무악재를 넘는, 비통하고 처연한 장례 행렬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