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호랑나비
화구를 메고 산을 첩첩 들어간 후 이내 종적이 묘연하다
단풍이 이울고 봉마다 찡그리고 눈이 날고
영 우에 매점은 덧문 속문이 닫히고 삼동내
-열리지 않었다 해를 넘어 봄이 짙도록 눈이
처마와 키가 같었다 대촉 캔바스 위에는 목화송이
같은 한 떨기 지난 해 흰 구름이 새로 미끄러지고
폭포 소리 차츰 불고 푸른 하늘 되돌아서 오건만 구두와
안ㅅ신이 나란히 놓인 채 연애가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날 밤 집집 들창마다 석간에 비린내가 끼치였다
박다태생 수수한 과부 흰 얼굴이사 회양
고성 사람들 끼리에도 익었건만 매점 바깥주인 된
화가는 이름조차 없고 송화가루 노랗고 뻑 뻑국
고비 고사리 고부라지고 호랑나비 쌍을 지어 훨훨
청산을 넘고.
주석
화구(畫具) 그림 그리는 데 쓰는 도구. 화가가 화구를 메고 산에 들어간 정황을 보인다.
이울고 꽃이나 잎이 시들어 빛깔이 바래고.
영(嶺) 우에 고개 위에. '영'은 산마루를 넘는 고개.
삼동(三冬)내 겨울 석 달 내내, 겨우내.
대촉(大幅) 캔바스 큰 폭의 캔버스. 그림을 그리는 천.
안ㅅ신 안신, 곧 실내에서 신는 신·덧신을 이르는 말.
석간(夕刊) 저녁에 발행되는 신문. 화가의 변고가 저녁 신문에 실렸음을 암시한다.
박다(博多) 태생 일본 후쿠오카의 하카타(博多) 출신. '박다'는 하카타의 한자 표기.
회양(淮陽)·고성(高城) 강원도의 지명. 금강산 일대의 고을들.
심상·해설
화구를 메고 깊은 산에 든 화가가 종적을 감추고 매점은 겨우내 닫힌 채 눈이 처마 높이로 쌓이는데, 빈 캔버스 위로 흰 구름이 흐르고 봄이 와도 주인 없는 신만 나란히 남은 자리에서 죽음의 비린내가 번지고, 끝내 호랑나비 한 쌍이 청산을 넘어가는 쓸쓸한 서사가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