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젊은이의 시절
아침 이슬이 겨우 풀끝에서 사라지려 하는 봄날 아침이었다. 부드러운 공기는 온 우주의 향기를 다 모아다가 은하 같은 맑은 물에 씻어 그윽하고도 달콤한 냄새를 가는 바람에 실어다 주는 듯하였다. 꽃다운 풀 냄새는 사면에서 난다.
작은 여신의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풀포기 위에 다리를 뻗고 사람의 혼을 최면제(催眠劑)의 마약으로 마비시키는 듯한 봄날의 보이지 않는 기운에 취하여 멀거니 앉아 있는 조철하(趙哲夏)는, 그의 핏기 있고 타는 듯한 청년다운 얼굴은 보이지 않고 어디인지 찾아낼 수 없는 우수의 빛이 보인다.
그는 때때로 가슴이 꺼지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천천한 걸음으로 시내가 흐르는 구부러진 나무 밑으로 갔다. 흐르는 맑은 물은 재미있게 속살대며 흘러간다. 푸른 하늘에 높다랗게 떠가는 흰 구름이 맑은 시내 속에 비치어 어룽어룽한다.
[중략] 청년 조철하는 음악가가 되기를 갈망하나 실업가인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괴로워한다. 그를 이해해 주던 누이 경애(瓊愛)는 예술가 영빈(英彬)을 사랑하다 버림받고, 철하는 누이의 불행에 분노한다. 철하는 꿈속에서 사막을 헤매며 예수와 마왕과 음악의 여신을 차례로 만나, 위안도 유혹도 끝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함을 본다. 깨어 보니 그 여신을 잡았던 손에는 자기 누이의 고운 손이 잡혀 있었다.
— 본문 중 마왕이 부르는 노래 —
빙글빙글 웃는 달
나의 얼굴 밝히소서
첫날 저녁 촛불 밑에
다홍치마 입고서
비스듬히 기대앉아
아무 소리 아니하고
신랑의 얼굴만
곁눈으로 흘겨보는
새색시의 얼굴 같은
달님의 얼굴빛을
나는 보기 원합니다.
쌍긋쌍긋 웃는 별님
홍등촌 사창(紗窓) 열고
바깥 보고 혼자 서서
지나가는 손님 보고
치마고리 입에 물고
가는 허리 배배 꼬며
푸른 웃음 던지면서
부끄러워 창 톡 닫고
살짝 돌아 들어가는
빨간 사랑 감춘
웃는 아씨 그것같이
나에게도 그 웃음을
던져 주기 비옵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하늘 위에 흐르는 물
은하수가 되었어라
인간에는 물이지만
하늘에는 술뿐이라
쉬지 않고 흐르는 술
인간에도 들어부어
눈물 없는 이 마왕과
한숨 없는 이 마왕과
원망 없는 이 마왕과
거짓 없는 이 마왕과
웃음뿐인 이 마왕과
즐거움만 아는 나와
사랑만 아는 나와
꿈속에서 아찔하게
영원토록 살려 하는
이 마왕의 모든 친구
모두 모시게 하옵소서.
하하하 하하하하하.
주석
환희(歡喜) 나도향의 장편소설. 「젊은이의 시절」은 그와 같은 시기의 초기 단편으로, 예술가를 꿈꾸는 청년의 우수와 감상을 그림.
최면제(催眠劑) 잠이 오게 하는 약, 수면제.
사창(紗窓) 비단을 바른 창. 여기서는 홍등가(유곽) 기녀의 방 창을 가리킴.
마왕(魔王) 쾌락과 망각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악마의 우두머리. 작중 철하를 시험하는 존재로 등장.
갈보리 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 언덕(라틴어 Calvaria). 작중 꿈에 예수가 나타나는 장면의 배경.
야차(夜叉) 불교에서 사람을 해치는 사나운 귀신. 작중 격한 비유로 쓰임.
심상·해설
이슬 맺힌 봄날 시냇가에서 우수에 잠긴 청년이, 달빛 가득한 사막의 꿈속에서 예수와 마왕과 음악의 여신을 차례로 만나는 환상적이고 감상적인 장면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