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소묘
검은 옷이 길 대로 길구나, 머리꼭뒤에 위태하게 붙은 검은 동그란 헝겊은 무엇이라 이름하느뇨? 얼마나 큰 몸이며 굵은 목 얼마나 두꺼운 손이랴. 그러나 그가 목련화 나무 아래로 고전스러운 책을 들고 보며 이리저리 걷는다기보다 돌고 도는 것이 코끼리같이 상서로웁고도 발소리 없이 가벼웠다.
나는 프랑스 사람과 말해 본 적이 없었다. 아직 말해보지 못한 푸른 눈을 가진 이는 아직 탐험하지 못한 섬과 같아서 나의 이상스런 사모와 호기심이 흰 돛폭을 폈다. 걸음은 부르지 않는 그에게로 스스로 옮겨지는 것이었다. 그의 관심이 내게로 향해 오지 않는 것이 도리어 그의 초월한 일과를 신비롭게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이마를 든 해바라기꽃은 오로지 태양을 향해 돌거니와 이 이는 누구를 향해 보이지 않는 백금 원주를 고요히 걷느뇨?
회의증스런 발은 다시 멈칫하였다. 호기심은 역시 거리를 두고 수줍게 펴고 있었다. 그의 큰 몸은 무슨 말 없는 큰 교훈과 같아서 가까이 범하기는 좀 위엄성스러운 까닭이었던지-. 보기 좋게 갈라지는 밤빛 수염은 바람을 맞이한 무성한 풀의 사면과 같이 황홀하였다. 그날의 나는 금단추 다섯 개 단 제복의 햄릿이었다. 한낮에 만난 흑장의(黑長衣)들은 「왕」 앞으로 더 가까이 가자 얼굴이 마주 비추자! 눈이 하나 없다.
외눈박이 프랑스 신부는 우울한 환멸의 존재로 섰을 뿐이었다.
약간 머리를 숙여 건조한 예의를 표하고 그의 앞을 바람을 헤치며 지나갔다.
날 듯한 고딕 성당은 오늘도 높구나! 깃발을 떼인 마스트 같은 첨탑! 어루만질 수 없고 폭 안기일 수도 없는 「거대」한 향수여! 뒤로 돌아 깎아 올라간 둥근 돌기둥 그늘진 구석으로 들어가 앞길에 비를 내다보는 나그네처럼 화강석 차디찬 피부에 뺨을 부비고 있었다.
며칠 뒤-
미스·R은 제비집과 함께 붙이고 있는 나의 이층을 찾아왔었다.
『「킹·어브·킹스」 초대권 가지고 왔습니다』
감사한 인사를 하기보다 성급한 나의 자랑은
『당신네 교회 가봤지요. 그 프랑스 신부 눈이 하나 없습디다그려』
『눈이 하나 없다니요?』
『외눈이에요 외눈!』
『잘못 보셨지요』
수선스런 나의 쾌활은 겸손한 냉정에 그날도 스스로 시들어지고 말았다.
『초대권 이에요? 고맙습니다』
나의 시각은 정오 가까이 한창 지절대는 도시 위에 떠오른 기구의 글자를 읽었다.
다음 주일 아침 미사로부터 풀려나와 비둘기같이 설레는 신자들 틈에 나도 섞이었다. 길들지 않는 외톨 산비둘기의 날개는 조화롭지 않았다.
미스·R과 아침 인사를 바꾸자 가벼운 긴장을 느끼었다. 나의 시각의 틀림없음을 요행히 기대하며 성당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그만 산처럼 옮겨오는 프랑스 신부가 보이자 나의 자중은 제재를 잃어 용감한 권투선수처럼 앞으로 다가나갔다. 이는 틀림없는 눈이 둘이다!
수풀 속으로 내다보는 조그만 호수 같은 눈이 들어온다. 천국이 바로 비치는 순수한 렌즈에 나의 몸새는 한낱 헤매는 나비이더뇨?
미스·R은 얼굴이 함폭 미소를 피었다. 나의 이른 아침 부끄럼은 가벼이 상혈(上血)하였다.
『신부님, 저하고 한 나라에서 온 분이십니다』
『신자시오?』
『아직은...... 아니세요』
말 모르는 포로처럼 나는 가슴에 달린 단추를 돌리고 있었다.
『오빠 청산학원 이십니까?』
『네 청산학원입니다』
『집에 오빠는 효성중학이에요』
그 아이는 망토 자락으로 감추다시피 한 P의 단추를 벌써 눈여겨두고 어린아이답게 첫인사를 부치는 것이었다.
『오빠는 대학부시군요』
P는 「네」 하는 응답은 생략하여 버렸다.
우월감이 아주 압복된 대화에는 솟아나오는 웃음이 아닌 웃음으로 말 뒤를 흐리어 버리는 것이 예(例)이다.
대학부가 무슨 수치가 되랴 그러나 K시 가톨릭교회에 발을 들이기 비롯하여 인사도 없이 얼굴을 익혀가는 그들 틈에서 P의 「프로테스탄트」는 잘 벗어지지 아니하는 모양새 다른 작은 신발이었다. 남의 눈에 주눅이 들리고 차차 색다른 부끄럼을 배워가던 까닭이다.
그 아이의 「오빠」 부름은 조금도 번접스럽지 속되지 않았다. 이 나라 그리스도교 소녀의 미덕을 보았음이다.
조그마한 손으로 찻반을 옮기고 따르고 하는 것이 그 아이에게는 힘에 하나 차는 큰 잔치 일이라 어른의 귀염성 없는 작법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아주 자연스런 유희였다.
따라주는 이른 아침 차는 겨우 쓴맛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도무지 절차를 이해할 수 없던 미사 의식의 신엄한 압박에서 벗어나온 P는 가벼운 구갈(口渴)과 같은 것을 느끼었다. 쓰디쓴 맛을 씹는 것은 어린아이에서 쫓기어나고 어른의 경험에 들어서기 전 P의 초조가 어떠한 「반성」을 반추하는 고적한 동작이었다.
찾아내야 할 「일과」를 아주 잃어버린 그에게는 그날 아침 한창 찻거리를 얻어왔으니- 그 아이는 「가톨릭교회 비둘기」라고 돌아와서 이야기하였다.
「가톨릭교회 비둘기」란 칭찬이 어찌하여 S의 옆으로 보는 뺨에 가벼운 질투를 반영하였더뇨?
질투란 것은 얼굴에 내리는 궂은 날씨라 웃어도 바로 태양이 되지 않았다.
『참 비둘기 같지요 깜찍도 하게』
S의 귓밥에는 귀고리하였던 바늘귀만 한 흔적이- 국경 압록강 근처에서 어린아이 적에 하는 풍속이라고 S는 말하였다- 그날 아침에는 두 뺨을 모두 차지하여 허무한 큰 소라 속만 하게 보이었다.
『교회는 모두 매한가지지 자기 신앙만 가지고 있으면 그만이지요』
『이젠 그 자기 신앙에 몹시 고달팠소』
『가톨릭만 신앙이에요?』
『..........』
『개성 없는 신앙이 무엇하오? 자유 없는!』
그는 왜 침묵하였더뇨? 일절에 피로한 그에게는 「자유」도 주체할 수 없이 구겨진 옷자락이었다. 「우울」은 일종 「오해」로 해석하려 하였다. S와의 사이도 단순한 「우정」으로 해석하자, 가장 가까이 마주 대한 두 언덕 위에 서자. 다만 그 사이에 시퍼런 뛰어넘지 못할 심연을 익히익히 들여다보자- 가장 자유로운 그리스도교도의 해석을 그는 취해진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어놓으신 심연을 신앙하였다, 그러나 몇 번이나 그는 언덕에서 현훈(眩暈)을 느끼었을까? 뛰어넘으면 넘는다. 넘고 아니 넘은 것은 하여간 이십칠 세 적 P는 가엾은 양심을 길렀다, 그것은 안으로 안으로 기어드는 작은 새로서 길 위에 떨어뜨려 없이 할까 하면 안으로 깃드는 것이었다.
『하여간 오늘은 좀 돌아다닙시다』
『가만히 들엎드리고 있으면 쓸데없이 회의만 생겨요』
아무것도 그리지 못한 그들의 「일과」 페이지는 결국 그날 오후 유월 해를 함폭 빨아들인 큰 거리로 펴졌다.
때리면 대리석 소리 날 듯한 푸른 하늘이었다.
두르는 단장에 적막한 희랍적 쾌활이 가다가 일어서고 가다가 멈추고 하면서.....
작자(作者)는 더 적고 싶어 싶어하는 버릇이 있다.
성당 안 제대 앞에는 성체등이 걸려 있다.
켠 불이- 고요히 기도하는 중에 보이는 것이니- 한낮에도 신비롭게 커졌다 작아졌다 할 때 거리에는 무수한 희랍적 쾌활이 일어섰다 수그러졌다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적이 아님으로 커졌다 작아졌다 보아도 좋고 그렇게 안 보아도 무방하다. 이는 성체등도 철저한 책임은 사양할 것이니, 다만 지성(至聖)한 옥좌를 비추는 영원한 붉은 별임으로.
......원락을 줍는다...... 산뜻하고도 쾌활한 유행어를 그대로 직역하듯이 우리는 올라탔다. 이 중에는 말타기 노새타기를 욕심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붉은 우체통 옆에서 비 맞고 전차 기다리기란 무슨 초라한 꼴이랴!
서울 태생은 모름지기 원락을 타라.
손쉽게 들어온 쉐볼레 한 대로 우리는 왕자연(王子然)하게 그날 오후의 행복을 꽃다발 묶어 들 듯 하였다.
『타는 맛이 다르지?』
『포드는 더 낫지!』
『무슨? 쉐볼레가 제일이야!』
젖은 아스팔트 위로 달리는 기체는 가볍기가 흰 고무볼 한 개였다.
『순사만 세워두고 싶지?』
『다른 사람은 모두 비껴나게 하구!』
『하하......』
붉은 벽돌 빌딩들이 후르륵 떨고 일어서고 일어서고 한다.
『남대문통을 지나는 시민 제씨 탈모!』
청제비 한 쌍이 커브를 돌아 스치고 간다.
유리쪽에 날벌레처럼 모여드는 빗낱이 다시 방울을 맺어 미끄러진다.
우리들의 쉐볼레는 아주 눈물겹게 일심으로 달린다.
C인쇄공장 정문에 들어서면서 박쥐우산 날개를 차곡 접어들고 교정실 문을 열 때는 모자를 벗고 테이블에 둘러앉아선 유리잔에 찬물을 마셨다. 이리하여 우리들의 다만 십 분간의 사치는 활주하여 버리고 결국 남대문 큰 거리를 지나온 한 시민이었다.
얼마 안 있어 교정거리가 들어왔다.
활자 냄새가 이상스런 흥분을 일으키도록 향기롭다. 우리들의 시(詩)가 까만 눈을 깜박이며 소곤거리고 있다. 시는 활자화한 뒤에 훨씬 효과적이다. 시의 명예는 활자 직공에게 반분하라. 우리들의 시는 별보다 알뜰한 활자를 운율보다 존중한다. 윤전기를 지나기 전 시는 생각하기에도 촌스럽다. 이리하여 시는 기차로 항로로 항공우편으로 신호와 함께 흩어져 나르는 군용구(軍用鳩)처럼 날아간다.
『시의 라디오 방송은 어떨까?』
『저속한 성악과 혼동되기 쉽다』
『시의 전신 발송은 어떨까?』
『전보시!』
『유쾌한 시학이나 전보시!』
돌아올 때는 B정 네거리에서 회색 버스를 탔다.
얼마나 허울한 내부인지 확실히 벼룩이 하나 크게 뛰었다. 사나운 말 갈기를 휘어잡듯 하고 심한 동요에 걸디었다.
우리는 약속한 듯이 침묵하였다. 표정 없는 눈은 아무 곳도 아닌 곳 한가운데로 모이어 지난 엿새 동안에 제각기 맡은 「영혼의 얼굴」을 살펴보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 다음날은 주일. 일곱시 반 저녁 삼종이 울기 전까지는 이 영혼의 얼굴의 개이고 흐리고 하였던 윤곽을 또렷하게 암기하여 두었다가 풀 데 가서 풀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홀벗은 버스 안에 남은 짧은 시간을 이용하기에 골몰하였다.
저쪽으로부터 떠들썩하게 정답게 인사하는 친구여 흔히 이 검소한 버스 안에서 우리가 새초롬하게 보일 때가 있거든, 우리 얼굴 안에 또 있는 얼굴에 우리 얼굴이 파묻힐 때가 있어서 정다운 그대 얼굴이 들어온 줄을 혹 깨닫지 못함이니 깊이 용서하오.
대성당에 들어설 때는 더욱 엄숙하게도 냉정하여진다.
몇 시간 동안 우리들의 쾌활한 우정도 신 벗듯하고 일절의 언어도 희생하여 버린다. 성수반(聖水盤)으로 옮겨가서 거룩한 표를 이마로부터 가슴 아래로 다시 두 어깨까지 그은 뒤에 호흡이 계속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육체를 망각한 영혼의 숨소리뿐이다.
성체등의 붉은 별만 한 불은 잘 때가 없다. 성체합 안에 숨으신 예수는 휴식이 없으시다는 상징으로-.
성당 안에 들어오면 어찌하여 우리는 죽기까지 부끄러운 죄인이면서 또한 가장 영광스런 기사적 무릎을 꿇느뇨?
성당 안에 들어오면 우리의 목표는 혹은 어느 곳에서든지 어느 때든지 영원한 목표와 예배하는 방향은 어디이뇨?
누구든지 우리들이 된 후에는 스스로 깨달으리라.
다시 고해소로 옮길 때에는 이 큰 고딕 건물이 한편으로 옴쳐오는 듯이 우리의 동작으로는 더할 수 없는 조심성과 겸손과 뉘우침을 다하여 걷는다.
옷이 오래되면 때묻음도 할 수 없는 사정이요 따라서 깨끗이 빪도 자연한 순서임으로 고해소에서 일어나올 때는 결코 신경적이 아닌 순수한 이성의 눈물과 함께 투명한 해저를 여행하고 나온 듯이 신비로운 평화의 산호 가지를 한 아름 안고 나온다.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역시 성수를 통하여 성당에서 나왔다.
비가 다시 쏟아진다.
완전히 초자연적 목욕을 마치고 난 뒤라 언덕에 오른 물새처럼 돌기둥 옆에 숨어서서 곱게 씻긴 날개를 아끼듯 쓰다듬듯 하였다.
우리들의 하나인 C도 성당에서 나와선 옆에 나란히 선다.
『비가 그칠 것 같지 않군!』
『글쎄』
종잇장만치 투명한 곳이 군데군데 있는가 하면 검은 구름이 파도처럼 옮겨오는 것이 쳐다보인다.
우리는 박쥐우산을 폈다.
우산 하나로는 둘의 몸을 오롯이 가릴 수 없다. 그러나 이만만 해도 그리스도적 우정만은 젖지 않게 할 수 있게 한 그늘 안에서 걸어 나섰다.
거리에는 불이 켜졌다.
서로 밤의 평화를 축복하여 우산 그늘 안에서 헤어졌다.
이리하여 오늘 하루는 하루대로 마치고 다음날 창에 구름 위 푸른 하늘과 함께 밝아올 주일을 맞이하기 위한 그리스도적 신부(新婦)의 조심스런 보금자리에도 불이 각각 기다리고 있다.
주석
머리꼭뒤 머리 뒤통수의 한가운데. 여기서 '검은 동그란 헝겊'은 가톨릭 성직자가 정수리에 쓰는 모자(주케토)를 가리킨다.
흑장의(黑長衣) 검은 긴 옷, 곧 가톨릭 신부가 입는 검은 수단(soutane)을 입은 사람들.
햄릿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회의하고 망설이는 자신을 금단추 단 제복 차림의 햄릿에 빗댄 것이다.
고딕 성당 뾰족한 첨탑을 가진 고딕 양식의 성당. 명동성당을 연상시킨다.
킹·어브·킹스(King of Kings) 세실 B. 드밀 감독의 1927년 예수 생애를 다룬 무성영화 '왕중왕'.
청산학원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학원(青山学院). 미션계 학교이다.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신교). 가톨릭교회 안에서 개신교 신자인 P가 느끼는 이질감을 '모양새 다른 작은 신발'에 빗댔다.
성체등(聖體燈) 성당 제대 곁에서 성체가 모셔져 있음을 알리며 늘 켜 두는 붉은 등불.
성수반(聖水盤) 성당 입구에 성수를 담아 두어 신자가 성호를 긋게 하는 그릇.
군용구(軍用鳩) 군용 통신에 쓰던 전서구(傳書鳩), 곧 통신용 비둘기.
삼종(三鐘) 가톨릭에서 아침·정오·저녁에 종을 울리며 바치는 삼종기도(Angelus).
쉐볼레·포드 1930년대의 미국제 자동차 쉐보레와 포드. 택시처럼 빌려 탄 승용차를 가리킨다.
심상·해설
유월의 비 내리는 도시에서 외눈박이로 잘못 보았던 프랑스 신부, 고딕 성당 첨탑과 붉은 성체등을 배경으로 신앙과 회의 사이를 오가는 젊은이들의 하루가 영화 장면처럼 선명하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