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
희미한 졸음이 활발한 님의 발자취 소리에 놀라 깨어 무거운 눈썹을 이기지 못하면서 창을 열고 내다보았습니다
동풍에 몰리는 소나기는 산모롱이를 지나가고 뜰 앞의 파초 잎 위에 빗소리의 남은 음파(音波)가 그네를 뜁니다
감정(感情)과 이지(理智)가 마주치는 찰나(刹那)에 인면(人面)의 악마(惡魔)와 수심(獸心)의 천사(天使)가 보이려다 사라집니다
흔들어 빼는 님의 노래 가락에 첫잠든 어린 잔나비의 애처로운 꿈이 꽃 떨어지는 소리에 깨었습니다
죽은 밤을 지키는 외로운 등잔불의 구슬꽃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고요히 떨어집니다
미친 불에 타오르는 불쌍한 영(靈)은 절망(絶望)의 북극(北極)에서 신세계(新世界)를 탐험(探險)합니다
사막(沙漠)의 꽃이여 그믐밤의 만월(滿月)이여 님의 얼굴이여
피려는 장미화(薔薇花)는 아니라도 갈지 않은 백옥(白玉)인 순결(純潔)한 나의 입술은 미소(微笑)에 목욕 감는 그 입술에 채 닿지 못하였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달빛에 눌리운 창에는 저의 털을 가다듬는 고양이의 그림자가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아아 불(佛)이냐 마(魔)냐 인생(人生)이 띠끌이냐 꿈이 황금(黃金)이냐
작은 새여 바람에 흔들리는 약한 가지에서 잠자는 작은 새여
주석
이지(理智)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이성과 슬기.
인면(人面)의 악마 / 수심(獸心)의 천사 사람 얼굴을 한 악마와 짐승 같은 마음을 지닌 천사.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존재를 대비한 표현.
잔나비 원숭이의 옛말.
불(佛)이냐 마(魔)냐 부처냐 마귀냐. 진리와 미혹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불교적으로 표현한 것.
심상·해설
소나기 지나간 한밤, 파초 잎에 남은 빗소리와 흔들리는 등잔불 아래에서 부처냐 마귀냐를 묻는 화자의 흔들리는 마음이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 위 작은 새의 잠으로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