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밤 (산문)
우리 서재(書齋)에는 좀 고전(古典)스런 양장책이 있을 만치보다는 더 많이 있다고 ─ 그렇게 여기시기를.
그리고 키를 꼭꼭 맞춰 줄을 지어 엄숙하게 들어 끼어 있어 누구든지 꺼내어 보기에 조심성스런 손을 몇 번씩 들여다보도록 서재의 품위(品位)를 우리는 유지(維持)합니다. 값진 도기(陶器)는 꼭 음식을 담아야 하나요? 마찬가지로 귀한 책은 몸에 병을 지니듯이 암기(暗記)하고 있어야 할 이유(理由)도 없습니다. 성화(聖畵)와 함께 멀리 떼어 놓고 생각만 하여도 좋고, 엷은 황혼(黃昏)이 차차 짙어갈 제 서적(書籍)의 밀집부대(密集部隊) 앞에 등을 향하고 고요히 앉았기만 함도 교양(敎養)의 심각(深刻)한 표정(表情)이 됩니다. 나는 나대로 좋은 생각을 마주 대할 때 페이지 속에 문자(文字)는 문자끼리 좋은 이야기를 이어 나가게 합니다. 숨은 별빛이 얼키설키듯이 빛나는 문자끼리의 이야기..... 이 귀중(貴重)한 인간(人間)의 유산(遺産)을 금자(金字)로 표장(表裝)하여야 합니다.
레오 • 톨스토이가 (그 사람 말을 잡아 피를 마신 사람!) 주름살 잡힌 인생관(人生觀)을 페이지 속에서 설교(說敎)하거든 그러한 책은 잡초(雜草)를 뽑아내듯 합니다.
책이 뽑히어 나온 부인(否認)된 곳 그러한 곳은 그렇게 적막(寂寞)한 공동(空洞)이 아닙니다. 가여운 계절(季節)의 다변자(多辯者) 귀뚜라미 한 마리가 밤샐 자리로 주어도 좋습니다.
우리의 교양(敎養)에도 가끔 이러한 문자(文字)가 뽑히어 나간 공동(空洞) 안의 부인된 하늘이 열리어야 합니다.
*
어느 겨를에 밤이 함폭 들어와 차지하고 있습니다. 『밤이 온다』 ─ 이러한 우리가 거리에서 쓰는 말로 이를지면 밤은 반드시 딴 곳에서 오는 손님이외다. 겸허(謙虛)한 그는 우리의 앉은 자리를 조금도 다치지 않고 소란치 않고 거룩한 신부(新婦)의 옷자락 소리 없는 걸음으로 옵니다. 그러나 큰 독에 물과 같이 충실(充實)히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어쩐지 적막(寂寞)한 손님이외다. 이야말로 거대(巨大)한 문자(文字)가 뽑히어 나간 공동(空洞)에 임하는 상장(喪章)이외다.
나의 걸음을 따르는 그림자를 볼 때 나의 비극(悲劇)을 생각합니다. 가늘고 긴 희랍적(希臘的) 슬픈 목아지에 팔굽이를 감아 봅니다. 밤은 지구(地球)를 따르는 비극(悲劇)이외다. 이 청징(淸澄)하고 무한(無限)한 밤의 목아지는 어드메쯤 되는지 아무도 안아 본 이가 없습니다.
비극(悲劇)은 반드시 울어야 하지 않고 사연하거나 흐느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로 비극(悲劇)은 묵(默)합니다.
그러므로 밤은 울기 전의 울음의 향수(鄕愁)요 움직이기 전의 몸짓의 삼림(森林)이요 입술을 열기 전 말의 풍부(豊富)한 곳집이외다.
나는 나의 서재(書齋)에서 이 묵극(默劇)을 감격(感激)하기에 조금도 괴롭지 않습니다. 검은 잎새 밑에 오롯이 눌리우기만 하면 그만이므로. 나의 영혼(靈魂)의 윤곽(輪廓)이 올빼미 눈자위처럼 동그래질 때입니다. 나무 끝 보금자리에 안긴 독수리의 흰 알도 무한(無限)한 명일(明日)을 향하여 신비(神秘)론 생명(生命)을 옴치며 돌리며 합니다.
설령 반가운 그대의 붉은 손이 이 서재(書齋)에 조화(調和)로운 고풍(古風)스런 램프불을 보름달 만하게 안고 골방에서 옮겨 올 때에도 밤은 그대 불의(不意)의 틈입자(闖入者)에게 조금도 황당하지 않습니다. 남과 사귈성이 찬란(燦爛)한 밤의 성격(性格)은 순간(瞬間)에 화원(花園)과 같은 얼굴을 바로 돌립니다.
주석
성화(聖畵) 예수·성모·성인 등 종교적 주제를 그린 그림.
레프 톨스토이 러시아의 대문호(1828~1910). '말을 잡아 피를 마신 사람'은 그의 만년 인생관을 비꼰 표현이다.
공동(空洞) 텅 빈 굴이나 구멍. 여기서는 책을 뽑아낸 책꽂이의 빈자리를 가리킨다.
상장(喪章) 거상(居喪)이나 조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가슴이나 팔에 다는 검은 천이나 표지.
묵극(默劇) 대사 없이 몸짓과 표정만으로 표현하는 무언극(마임).
틈입자(闖入者) 기회를 타서 느닷없이 함부로 들어온 사람, 곧 불청객·침입자.
심상·해설
고전 양장책이 줄지어 꽂힌 서재에 황혼이 짙어지고, 거룩한 신부의 옷자락처럼 소리 없이 들어찬 밤이 큰 독의 물처럼 가득 차오르며, 침묵하는 비극이자 말이 열리기 전의 풍부한 곳간으로서의 밤을 사색하는 정밀한 분위기가 감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