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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
1930년대

발문

정지용 · 1930년대
천재 있는 시인이 자기의 제작(制作)을 한번 지나가 버린 길이요 넘어간 책장같이 여겨 그것을 소중히 알고 애써 모아 두고 하지 않고 물 위에 떨어진 꽃잎인 듯 흘러가 버리는 대로 두고자 한다 하면 그 또한 그럴듯한 심원(心願)이리라. 그러나 범용(凡庸)한 독자(讀者)란 또한 있어 이것을 인색한 사람 구슬 갈무리하듯 하려 하고 「다시 또 한번」을 찾아 그것이 영원한 화병(花甁)에 새겨 머물러짐을 바라기까지 한다. 지용의 시가 처음 조선지광(朝鮮之光)(소화 이년 이월)에 발표된 뒤로 어느덧 십 년에 가까운 동안을 두고 여러 가지 간행물(刊行物)에 흩어져 나타났던 작품들이 이 시집에 모아지게 된 것은 우리의 독자적(獨自的) 심원(心願)이 이루어지는 기쁜 일이다. 단순(單純)히 이 기쁨의 표백(表白)인 이 발문(跋文)을 쓰는 가운데 내가 조금이라도 서문(序文)스런 소리를 늘어놓을 일은 아니요, 시는 제 스스로 할 말을 하고 갈 자리에 갈 것이지마는 그의 시적 발전(詩的發展)을 살피는 데 다소(多少)의 연대 관계(年代關係)와 부별(部別)의 설명(說明)이 없지 못할 것이다. 제2부(第二部)에 수합(收合)된 것은 초기 시편(初期詩篇)들이다. 이 시기는 그가 눈물을 구슬같이 알고 지어서라도 내려는 듯하던, 시류(時流)에 거슬려서 많은 많은 눈물을 가벼이 진실로 가벼이 휘파람 불며 비누방울을 날리던 때이다. 제3부(第三部) 요(謠)는 같은 시기의 부산(副産)으로 자연 동요(自然童謠)의 풍조(風調)를 그대로 띤 동요류(童謠類)와 민요풍 시편(民謠風詩篇)들이요. 제1부(第一部)는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改宗)한 이후 촛불과 손, 유리창, 바다·1 등으로 비롯해서 제작(制作)된 시편(詩篇)들로 그 심화(深化)된 시경(詩境)과 타협(妥協) 없는 감각(感覺)은 초기(初期)의 시작(詩作)이 손쉽게 친밀해질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경지(境地)를 밟고 있다. 제4부(第四部)는 그의 신앙(信仰)과 직접 관련(直接關聯) 있는 시편(詩篇)들이요. 제5부(第五部)는 소묘(素描)라는 제(題)를 띠었던 산문 이편(散文二篇)이다. 그는 한군데 자안(自安)하는 시인(詩人)이기보다 새로운 시경(詩境)의 개척자(開拓者)이려 한다. 그는 이미 사색(思索)과 감각(感覺)의 오묘(奧妙)한 결합(結合)을 향해 발을 내디딘 듯이 보인다. 여기 모인 팔십구 편(八十九篇)은 말할 것 없이 그의 제일 시집(第一詩集)인 것이다. 이 아름다운 시집에 이 졸(拙)한 발문(跋文)을 부침이 또한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불리기를 가만히 바라며 ─

주석

발문(跋文) 책의 끝에 그 책의 성립·전래·간행 경위 등을 적은 글. 이 글은 정지용 시집의 발문이다.

조선지광(朝鮮之光) 1922년에 창간된 잡지. 정지용의 시가 처음 발표된 지면으로, 본문의 '소화 이년'은 1927년이다.

촛불과 손, 유리창, 바다·1 정지용이 가톨릭 개종 이후 발표한 대표적 시 작품들의 제목.

시경(詩境) 시의 경지. 시가 다다른 정신적·예술적 경지를 이른다.

소화(昭和) 일본 쇼와 연호. 소화 2년은 1927년에 해당한다.

심상·해설

물 위에 떨어진 꽃잎처럼 흘려보내려는 시인의 작품을, 영원한 꽃병에 새겨 두고 싶은 독자의 마음으로 한데 모은 첫 시집의 발문으로, 십 년에 걸친 작품 세계의 변모를 부별로 짚어 가는 차분한 헌사가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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