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동경에서
오늘이 다 되도록 일본(日本)의 서울을 헤매어도
나의 꿈은 문둥이 살깃 같은 조선(朝鮮)의 땅을 밟고 돈다.
예쁜 인형(人形)들이 노는 이 도회(都會)의 호사(豪奢)로운 거리에서
나는 안 잊히는 조선의 하늘이 그리워 애달픈 마음에 노래만 부르노라.
「東京」의 밤이 밝기는 낮이다― 그러나 내게 무엇이랴!
나의 기억(記憶)은 자연(自然)이 준 등불 해금강(海金剛)의 달을 새로이 손짓한다.
색채(色彩)의 음향(音響)이 생활(生活)의 화려(華麗)로운 아롱사(紗)를 짜는―
예쁜 일본(日本)의 서울에서도 나는 암멸(暗滅)을 서럽게― 달게 꿈꾸노라
아 진흙과 짚풀로 얽맨 움 밑에서 부처같이 벙어리로 사는 신령아
우리의 앞엔 가느나마 한 가닥 길이 보이느냐― 없느냐― 어둠 뿐이냐?
거룩한 단순(單純)의 상징체(象徵體)인 흰옷 그 너머 사는 맑은 네 맘에
숯불에 손 덴 어린 아기의 쓰라림이 숨은 줄을 뉘라서 알랴!
벽옥(碧玉)의 하늘은 오직 네게서만 볼 은총(恩寵) 받았단 조선(朝鮮)의 하늘아
눈물도 땅속에 묻고 한숨의 구름만이 흐르는 네 얼굴이 보고 싶다
아 예쁘게 잘 사는 「東京」의 밝은 웃음 속을 온 데로 헤매나
내 눈은 어둠 속에서 별과 함께 우는 흐린 호롱불을 넋없이 볼 뿐이다.
―「鄕愁에서」―
주석
동경(東京) 일본의 수도 도쿄. 이상화가 1922~1923년 무렵 유학하며 머물던 도시이다.
문둥이 살깃 '살깃'은 살갗(살가죽). 문둥병으로 헐고 일그러진 살갗처럼, 헐벗고 병든 식민지 조선의 땅을 처참하게 비유한다.
해금강(海金剛) 강원도 고성 앞바다의 금강산 줄기. 바다 위로 솟은 기암절경으로, 조선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아롱사(紗) 여러 빛깔이 아롱진 얇은 비단(사). 도쿄의 화려한 도시 생활을 비유한다.
암멸(暗滅) 어둠 속으로 사라져 없어짐. 식민지 현실 속 절망과 자기 소멸의 정서를 담은 시인의 조어.
벽옥(碧玉) 푸른 빛깔의 옥. '벽옥의 하늘'은 맑고 푸른 조선의 하늘을 가리킨다.
흰옷 흰옷을 즐겨 입던 조선 민족(백의민족)을 상징한다.
심상·해설
불야성 같은 도쿄의 화려한 거리를 헤매면서도 마음은 헐벗은 조선 땅과 해금강의 달을 그리워한다. 흰옷 입은 동포와 어둠 속에서 별과 함께 우는 흐린 호롱불이 식민지 지식인의 향수와 비애를 짙게 드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