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말세의 희탄
저녁의 피 묻은 동굴(洞窟) 속으로
아- 밑 없는 그 동굴(洞窟) 속으로
끝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나는 거꾸러지련다
나는 파묻히련다.
가을의 병든 미풍(微風)의 품에다
아- 꿈꾸는 미풍(微風)의 품에다
낮도 모르고
밤도 모르고
나는 술 취한 집을 세우련다
나는 속 아픈 웃음을 빚으련다.
―『비음(緋音) 가운데서』―
주석
희탄(喜歎) 기쁨에 겨워 내뱉는 탄식, 또는 기쁨과 탄식이 뒤섞인 부르짖음. 제목 '말세의 희탄'은 절망적 시대를 향한 역설적 탄식을 담는다.
미풍(微風) 약하고 부드럽게 부는 바람. 산들바람.
비음(緋音) 이상화가 자신의 시편을 묶어 부른 제목. '붉은 소리'라는 뜻으로 정열과 죽음의 정서를 담는다.
심상·해설
저녁놀이 핏빛으로 물든 밑 없는 동굴로 거꾸러져 파묻히려는 절망. 병든 가을바람 속에서 술 취한 집을 세우고 속 아픈 웃음을 빚는, 시대의 끝에 선 자의 퇴폐적 탄식이 어둡게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