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가을의 풍경
맥(脈)풀린 햇살에, 번적이는 나무는, 선명(鮮明)하기 동양화(東洋畵)이러라
흙은, 아낙네를 감은, 천아융(天鵝絨) 허리띠 같이도, 따습어라
무거워 가는 나비 날개는, 드물고도 쇠(衰)하여라,
아, 멀리서 부는 피 소린가- 하늘 바다에서, 헤엄질하다.
병(病)들어 힘없이도 섰는 잔디풀— 나무가지로
미풍(微風)의 한숨은, 가는(細) 목을 매고, 껄떡이어라.
참새 소리는, 제 소리의 몸짓과 함께 가볍게 놀고
온실(溫室) 같은 마루 끝에 누운 검은 고양이의 등은, 부드럽게도, 기름져라.
청춘(靑春)을 잃어버린 낙엽(落葉)은 미친 듯, 나부끼어라,
서럽게도, 즐겁게, 조으름 오는 적막(寂寞)이, 더부렁그리다.
사람은, 부질없이, 가슴에다, 까닭도 모르는, 그리움을 안고,
마음과 눈으론, 지나간 푸름의 인상(印象)을 허공(虛空)에다 그리어라.
―『벙어리 노래』에서―
주석
천아융(天鵝絨) 벨벳, 곧 우단을 이르는 말. 부드럽고 광택이 도는 직물이다.
피 소린가 '피리 소리인가'의 줄어든 표기. 멀리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소리를 가리킨다.
더부렁그리다 여럿이 한데 어우러져 떠돌거나 들떠 일렁이는 모양을 나타내는 옛말이다.
벙어리 노래 이 시가 수록된 시집·연작의 제목이다.
심상·해설
맥 풀린 가을 햇살에 나무가 동양화처럼 선명하고 검은 고양이가 마루 끝에 나른히 누운 한낮, 까닭 모를 그리움을 안은 이가 지나간 푸름을 허공에 그려 보는 정밀한 가을 풍경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