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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그립다
1920년대

그날이 그립다

이상화 · 1920년대
내 생명(生命)의 새벽이 사라지도다 그립다, 내 생명(生命)의 새벽― 설어라 나 어릴 그때도 지나간 검은 밤들과 같이 사라지려는도다 성녀(聖女)의 피수포(被首布)처럼 더러움의 손 입으로는 감히 대이기도 부끄럽던 아가씨의 목― 젖가슴빛 같은 그때의 생명(生命)! 아 그날 그때에는 낮도 모르고 밤도 모르고 봄빛을 머금고 움 돋던 나의 영(靈)이 저녁의 여울 위로 곤두치는 고기가 되어 술취한 물결처럼 갈모로 춤을 추고 꽃심의 냄새를 뿜는 숨결로 아무 가림도 없는 노래를 잇대어 불렀다 아 그날 그 때에는 낮도 없이 밤도 없이 행복(幸福)의 시내가 내게로 흘러서 은(銀)칠한 웃음을 만들어만 내며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고 눈물이 나와도 쓰린 줄 몰랐다 내 목숨의 모두가 봄빛이기 때문에 울던 이도 나만 보면 웃어들 주었다 아 그립다 내 생명(生命)의 새벽― 설어라 나 어릴 그 때도 지나간 검은 밤들과 같이 사라지려는도다 오늘 성경(聖經) 속의 생명수(生命水)에 아무리 조촐하게 씻은 손으로도 감히 만지기에 부끄럽던 아가씨의 목― 젖가슴빛 같은 그때의 생명(生命)!

주석

피수포(被首布) 머리를 덮어 가리는 천. 성녀가 머리에 두르는 베일(머릿수건)을 가리킨다.

갈모로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어진 모양으로. 한쪽으로 쏠려 비낀 자세를 뜻하는 옛말.

생명수(生命水)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 요한계시록 등에 나오는 신앙적 상징.

심상·해설

봄빛을 머금고 움트던 어린 날의 순결한 생명이 검은 밤처럼 사라지는 새벽의 풍경. 술 취한 물결처럼 춤추던 영혼과 은빛 웃음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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