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나는 해를 먹다
구름은 차렵옷에 놓기 알맞아 보이고
하늘은 바다같이 깊다랗다 하다.
한낮 또약볕이 쬐는지도 모르고
온 몸이 아니 넋조차 깨운― 아찔하여지도록
뼈저리는 좋은 맛에 자지러지기는
보기 좋게 잘도 자란 과수원(果樹園)의 모꼬지다.
배추 속처럼 핏기 없는 얼굴에도
푸른 빛이 비치어 생기를 띠고
더구나 가슴에는 깨끗한 가을 입김을 안은 채
능금을 바수노라 해를 지우나니.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발을 뻗기도 하면서
무성한 나뭇잎 속에 숨어 수줍어하는
탐스럽게도 잘도 익은 과일을 찾아
위태로운 이 짓에 가슴을 조이는 이때의 마음 저 하늘같이 맑기도 하다.
머리카락 같은 실바람이 아무리 나부껴도
메밀 꽃밭에 춤추던 벌들이 아무리 울어도
지난 날 예쁜이를 그리어 살며시 눈물지는,
그런 생각은 꿈 밖에 꿈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남의 과일밭에 몰래 들어가
험상스런 얼굴과 억센 주먹을 두려워하면서.
하나 둘 몰래 훔치던 어릴 적 철없던 마음이 다시 살아나자
그립고 우습고 죄 없던 그 기쁨이 오늘에도 있다.
부드럽게 쌓여 있는 이랑의 흙은
솥뚜껑을 열고 밥김을 맡는 듯 구수도 하고
나무에 달린 과일― 푸른 그릇에 담긴 깍두기 같이
입안에 맑은 침을 자아내나니.
첫 가을! 금호강(琴湖江) 굽이쳐 흐르고
벼 이삭 배부르게 늘어져 섰는
이 벌판 한가운데 주저앉아서
두 볼이 비좁게 해같은 능금을 나는 먹는다.
【註】 능금……(능금林檎)……
주석
차렵옷 솜을 얇게 두어 지은 옷. 봄가을에 입는 겹옷을 가리킨다.
모꼬지 여러 사람이 놀이나 잔치 따위로 모이는 일. 여기서는 과수원이 풍성하게 차려진 잔치판 같다는 뜻.
금호강(琴湖江) 경상북도 대구 지역을 흐르는 강. 시인의 고향 대구를 배경으로 한다.
능금(林檎) 사과의 옛 이름. 한자 임금(林檎)에서 온 토착 사과 품종을 이른다.
심상·해설
햇살을 흠뻑 머금은 능금을 한입 베어 무는 첫 가을 과수원의 풍요. 금호강 굽이치는 벌판 한가운데 주저앉아 해 같은 사과를 먹는 생기와 즐거움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