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월향구천곡
─슬픈 이야기
오렌지 껍질을 벗기면
손을 적신다.
향(香)내가 난다.
점잖은 사람 여러이 보이인 중(中)에 여럿은 웃고 떠드나
기녀(妓女)는 호올로
옛 사나이와 흡사한 모습을 찾고 있었다.
점잖은 손들의 전(傳)하여 오는 풍습(風習)엔
계집의 손목을 만져주는 것,
기녀(妓女)는 푸른 얼굴 근심이 가득하도다.
하─얗게 훈기는 냄새
분 냄새를 지니었도다.
옛이야기 모양 거짓말을 잘하는 계집
너는 사슴처럼 차디찬 슬픔을 지니었구나.
한나절 태극선(太極扇) 부치며
슬픈 노래, 너는 부른다
좁은 버선 맵시 단정히 앉아
무던히도 총총한 하루하루
옛 기억의 엷은 입술엔
포도(葡萄) 물이 젖어 있고나.
물고기와 같은 입 하고
슬픈 노래, 너는 조용히 웃도다.
화려한 옷깃으로도
쓸쓸한 마음은 가릴 수 없어
스란치마 땅에 끄을며 조심조심 춤을 추도다.
순백(純白)하다는 소녀(少女)의 날이여!
그렇지만
너는 매운 회초리, 허기찬 금식(禁食)의 날
오─끌리어 왔다.
슬픈 교육(敎育), 외로운 허영심(虛榮心)이여!
첫사람의 모습을 모듬 속에 찾으려 헤매는 것은
벌─써 첫사람은 아니라.
잃어진 옛날로의 조각 진 꿈길이니
바싹 마른 종아리로
시들은 화심(花心)에
너는 향료(香料)를 물들이도다.
슬픈 사람의 슬픈 옛일이여!
값진 패물로도
구차한 제 마음에 복수(復讐)는 할 바이 없고
다 먹은 과일처럼 이 틈에 끼어
꺼치거리는 옛 사랑
오─방탕(放蕩)한 귀공자(貴公子)!
기녀(妓女)는 조심조심 노래하도다. 춤을 추도다.
졸리운 양, 춤추는 여자야!
세상(世上)은
몸에 이익하지도 않고
가미(加味)를 모르는 한약(漢藥)처럼 쓰고 틉틉하고나.
주석
월향구천곡(月香九天曲) '월향'은 기녀의 이름이자 '달빛 향기'를 뜻하고, '구천곡'은 아득한 하늘(구천)에 사무치는 노래라는 뜻. 한 기녀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제목.
기녀(妓女)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춤·풍류로 흥을 돋우던 여자, 곧 기생.
태극선(太極扇) 태극무늬를 그려 넣은 둥근 부채.
스란치마 치맛단에 스란(금박 무늬를 놓은 단)을 댄, 폭이 넓고 긴 예장용 치마.
화심(花心) 꽃의 한가운데, 꽃술. 여기서는 시들어 가는 여인의 마음·자태를 비유함.
가미(加味) 본디 약 처방에 다른 약재를 더하는 일. 여기서는 '맛을 더함', 곧 제대로 된 조미·풍미를 뜻함.
틉틉하고나 '텁텁하다'의 옛 표기. 맛이 깔끔하지 못하고 텁텁함.
심상·해설
술자리의 웃음과 분 냄새 속에서 옛사랑의 모습을 홀로 더듬으며, 화려한 옷자락으로도 가릴 수 없는 쓸쓸함을 안고 스란치마를 끌며 슬픈 노래와 춤을 이어 가는 한 기녀의 시든 생애와 한이 애잔하게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