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벽서
낡은 초집 벽에
피로 쓴 글씨
그 동안 많지 않은 세월에도
벌써 곰팡이 피어 잘 보이지 않나니.
인생의 길은 약속 없고
허다히 지나는 비바람에
이 벽마저 무너지면
외나무다리 걸어온 내 집 역사를
어디에서 또 더듬으리오.
두 손에 촛불 들고
깊은 밤 낙엽에 꿇어앉아서
삼가이 내 다시 들을 읽을 제
할아버지 허—연 수염이 바람에 날리다.
주석
벽서(壁書) 벽에 써 놓은 글. 여기서는 조상이 벽에 피로 남긴 글씨를 가리킴.
초집 초가집의 준말.
허다히 수없이 많이.
들을 읽을 제 '들'은 '글'의 옛 표기 또는 오기로, '글을 읽을 때'의 뜻으로 풀이됨.
심상·해설
낡은 초가집 벽에 피로 쓴 조상의 글씨가 곰팡이에 지워져 가고, 깊은 밤 촛불을 들고 낙엽에 꿇어앉아 글을 읽노라니 할아버지의 허연 수염이 바람에 날리는 듯한 장면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