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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1920년대

분신

김명순 · 1920년대
눈을 감으면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고 남빛 안개 속의 조약돌 길 위를 한 처녀 거지가 무엇을 찾는 듯이 앞을 바라보고 뒤를 돌아다보고 새파랗게 질려서 보인다 내 머리를 돌리면 분명히 생각나는 일이 있다 삼 년 전 가을의 흐린 아침이었다 나는 학교에 가는 길가에서 나를 향해 오는 그림자를 보았다 그리고 “어디를 가시오?” 하는 그 분명한 음성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멈추는 저의 발걸음을 멈출 틈도 없이 쏜살과 같이 저의 앞을 말없이 걸어갔다. 그러고 내 마음속에 겨우 삼 년 기른 환상(幻像)의 파랑새를 그 길 너머로 울면서 놓았다 하나 이 명상(冥想)의 때에 무슨 일로 옛 설움아 또 오는가, 사람에게 상냥한 내가 아니었고 새를 머물러 둘 내 가슴이 아니었다 가시덩굴 같은 이 가슴 속에서 옛 설움아 다시 내 몸을 상치 말라!

주석

분신(分身) 하나의 몸이 둘로 나뉜 것. 여기서는 안개 속 처녀 거지가 시적 화자의 또 다른 자아로 비친다.

환상(幻像)의 파랑새 이루지 못한 사랑이나 희망을 상징하는 환상의 새. 파랑새는 행복·이상의 상징이다.

명상(冥想)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에 잠김.

상치 말라 '상하게 하지 말라'의 준말. '상치'는 '상하게 하지'의 옛 어형.

심상·해설

눈을 감으면 안개 속 길을 헤매는 또 다른 내가 보이고, 삼 년 전 외면했던 만남과 울며 놓아 보낸 파랑새의 기억이 가시덩굴 같은 가슴을 다시 찌르는 쓸쓸한 회상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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