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필경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 종이 위를 갈(耕)며 나간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犁)요, 유일(唯一)한 연장이다.
거친 산기슭에 한 이랑(畝)의 화전(火田)을 일구려면
돌부리와 나무 등걸에 호미 끝이 부러지듯이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었던고?
그러나 파랗고 빨간 「잉크」는 정맥(靜脈)과 동맥(動脈)의 피
최후(最後)의 일적(一滴)까지 종이 위에 그 피를 뿌릴 뿐이다.
비바람이 험궂다고 역사(歷史)의 바퀴가 역전(逆轉)할 것인가
마지막 심판(審判) 날을 기약(期約)하는 우리의 정성(精誠)이 굽힐 것인가
동지(同志)여 우리는 퇴각(退却)을 모르는 전위(前衛)의 투사(鬪士)다.
「박탈(剝奪)」, 「아사(餓死)」, 「음독(飮毒)」, 「자살(自殺)」의 경과보고(經過報告)가 우리의 밥벌이냐
「아연(俄然)활동(活動)」, 「검거(檢擧)」, 「송국(送局)」, 「판결언도(判決言渡)」, 「오년(五年)」, 「십년(十年)」의
스코어를 적는 것이 허구한 날의 직책(職責)이란 말이냐
창(槍)끝같이 철필(鐵筆)촉을 벼려 모든 암흑면(暗黑面)을 파헤치자
샅샅이 파헤쳐 온갖 죄악(罪惡)을 백주(白晝)에 폭로(暴露)하자.
스위치를 젖혔느냐 윤전기(輪轉機)가 돌아가느냐
깊은 밤 맹수(猛獸)의 포효(咆哮)와 같은 굉음(轟音)과 함께
한 시간(時間)에도 몇 만(萬) 장이나 박아 돌리는 활자(活字)의 위력(威力)은,
민중(民衆)의 맥박(脈搏)을 이어 주는 우리의 혈압(血壓)이다.
오오 붓을 잡은 자(者)여 위대(偉大)한 심장(心臟)의 파수병(把守兵)이여!
1930.7.
주석
필경(筆耕) 붓으로 밭을 간다는 뜻으로, 글을 써서 생계를 이어 가거나 글쓰기를 천직으로 삼는 일을 비유함.
전위(前衛)의 투사(鬪士) 맨 앞에서 싸우는 투사. 여기서는 언론·필봉으로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는 글쟁이를 가리킴.
송국(送局) 수사 기관이 피의자를 검찰청으로 넘기던 일제강점기의 사법 절차 용어.
철필(鐵筆) 쇠 펜촉. 등사 원지를 긁거나 글씨를 쓰던 펜으로, 여기서는 언론의 무기를 상징함.
윤전기(輪轉機) 신문 따위를 대량으로 인쇄하는 회전식 인쇄기.
심상·해설
붓을 쟁기 삼아 흰 종이를 밭 갈듯 나아가는 글쟁이가, 잉크를 피처럼 쏟으며 어둠을 파헤치고 깊은 밤 굉음 속에 윤전기를 돌리는 언론 투쟁의 결연한 장면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