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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셔요
1920년대

가지 마셔요

한용운 · 1920년대
그것은 어머니의 가슴에 머리를 숙이고 자깃자깃한 사랑을 받으려고 비죽거리는 입술로 표정(表情)하는 어여쁜 아기를 싸안으려는 사랑의 날개가 아니라 적(敵)의 깃발입니다 그것은 자비(慈悲)의 백호광명(白毫光明)이 아니라 번득거리는 악마(惡魔)의 눈(眼)빛입니다 그것은 면류관(冕旒冠)과 황금(黃金)의 누리와 죽음과를 본체도 아니하고 몸과 마음을 돌돌 뭉쳐서 사랑의 바다에 퐁당 넣으려는 사랑의 여신(女神)이 아니라 칼의 웃음입니다 아아 님이여 위안(慰安)에 목마른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대지(大地)의 음악(音樂)은 무궁화(無窮花) 그늘에 잠들었습니다 광명(光明)의 꿈은 검은 바다에서 자맥질합니다 무서운 침묵(沈默)은 만상(萬像)의 속살거림에 서슬이 푸른 교훈(敎訓)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아 님이여 새 생명(生命)의 꽃에 취(醉)하려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거룩한 천사(天使)의 세례(洗禮)를 받은 순결(純潔)한 청춘(靑春)을 똑 따서 그 속에 자기(自己)의 생명(生命)을 넣어서 그것을 사랑의 제단(祭壇)에 제물(祭物)로 드리는 어여쁜 처녀(處女)가 어디 있어요 달콤하고 맑은 향기(香氣)를 꿀벌에게 주고 다른 꿀벌에게 주지 않는 이상한 백합꽃이 어디 있어요 자신(自身)의 전체(全體)를 죽음의 청산(靑山)에 장사 지내고 흐르는 빛(光)으로 밤을 두 조각에 베이는 반딧불이 어디 있어요 아아 님이여 정(情)에 순사(殉死)하려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그 나라에는 허공(虛空)이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 전쟁(戰爭)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우주만상(宇宙萬像)의 모든 생명(生命)의 쇳대를 가지고 척도(尺度)를 초월(超越)한 삼엄(森嚴)한 궤율(軌律)로 진행(進行)하는 위대(偉大)한 시간(時間)이 정지(停止)되었습니다 아아 님이여 죽음을 방향(芳香)이라고 하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주석

백호광명(白毫光明)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난 흰 터럭(백호)에서 나온다는 자비의 빛.

면류관(冕旒冠) 임금이 정복에 갖추어 쓰던, 구슬을 늘어뜨린 관. 여기서는 권세와 영화를 상징한다.

쇳대 '열쇠'의 방언·옛말.

순사(殉死) 어떤 대상이나 의리를 위하여 따라 죽음.

궤율(軌律) 사물이 마땅히 따라야 할 법칙이나 질서.

방향(芳香) 꽃다운 향기.

심상·해설

겉으로 사랑과 위안처럼 보이지만 실은 적의 깃발이요 칼의 웃음인 길을 향해 가려는 님을 향해, 그곳으로는 가지 말라고 거듭 절규하듯 만류하는 비장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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