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패성의 가인
네 무덤에 눈이 덮였구나
흰 조갑지를 씻어서 엎어 논듯
새하얀 눈이 소복히 쌓였구나.
흑진주(黑珍珠)같이 영롱(玲瓏)하던 너의 눈도
복숭아를 쪼개논듯 연붉던 너의 입도
그리고 풀솜처럼 희고 부드럽던 너의 살도,
저 눈속에, 저 흙속에 파묻히고 말았구나.
네 마음 속의 조그만 허영(虛榮)이
죄(罪) 없는 네 몸을 죽음의 길로 이끌었다.
참새가 한섬 곡식을 다 먹지 못하고
비단 옷도 열겹 스무겹 껴입지는 못할 것을
논에 몸을 팔아 일찌감치 죽음을 샀구나.
구두를 전당(典當)잡혀 고무신짝을 끌고
네게로 달려 갔을 때 너는 나를 보지도 않았더니라.
병(病)든 네 몸을 위하여 그 사나이와 칼부림할 때
너는 돌아 앉아 나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더니라.
대동강(大同江)은 얼음만 풀리면 전(前)과 같이 흐르려니
이제 청류벽(淸流壁)을 끼고 도는 내 그림자만 외롭구나!
봄이나 와야 저 산(山)기슭에 새들이 울어 주지 않으랴
꽃이나 피어야 네 무덤에 한 송이 꽂아 주지 않으랴.
주석
패성(浿城)의 가인(佳人) 평양의 미인. '패성'은 패강(浿江, 대동강)을 낀 성이라는 뜻으로 평양의 다른 이름이고, '가인'은 아름다운 여인을 이른다.
조갑지 조개껍데기의 방언.
전당(典當)잡히다 돈을 빌리면서 물건을 담보로 맡기다.
대동강(大同江) 평양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 패강(浿江)이라고도 한다.
청류벽(淸流壁) 평양 대동강 가, 모란봉 아래에 깎아지른 벼랑. 부벽루·을밀대와 함께 평양의 명승이다.
심상·해설
흰 조개껍데기를 엎어 놓은 듯 눈 덮인 평양 여인의 무덤 앞에서, 흑진주 같던 눈과 연붉던 입을 떠올리며 얼어붙은 대동강 청류벽을 홀로 도는 시인의 외로운 그림자가 애잔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