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1950년대
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草笠)에 쾌자(快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되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 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된다.
산 넘어 지나온 저 촌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주석
남사당(男寺黨) 조선 후기에 떠돌아다니며 노래·춤·곡예 등을 공연하던 남자들의 유랑 예인 집단. 또는 그 패의 한 사람.
초립(草笠) 어린 사내나 신분 낮은 이가 쓰던, 풀이나 가는 대로 엮은 갓.
쾌자(快子) 등 솔기가 길게 터진, 소매 없는 전통 겉옷. 군복이나 놀이패 복장으로 쓰였다.
조라치 남사당패에서 날라리(태평소) 등 악기를 불며 풍악을 잡는 잡이들.
날라리 태평소. 끝이 나팔처럼 벌어진 관악기로, 놀이판의 흥을 돋움.
향단이 춘향전에 나오는 춘향의 몸종. 남사당패의 여장(女裝) 소년이 맡던 여자 배역을 이름.
심상·해설
분칠하고 다홍치마를 두른 채 여자 배역을 연기하는 유랑 사내가, 날라리 소리 울리는 포장 속 굴욕과 떠도는 신세의 설움을 슬픔과 기쁨이 섞인 채 드러내는 장면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