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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한 토막
1930년대

생명의 한 토막

심훈 · 1930년대
내가 음악가(音樂家)가 된다면 가느다란 줄이나 뜯는 제금가(提琴家)는 아니 되려오. High C까지 목청을 끌어 올리는 「카루소」 같은 성악가(聲樂家)가 되거나 「샬랴핀」만치나 우렁찬 베이스로, 내 설움과 우리의 설움을 버무려 목구멍에 피를 끓이며 영탄(咏嘆) 노래를 부르고 싶소. 창자(腸子) 끝이 묻어나도록 성량(聲量)껏 내뽑다가 설움이 복받쳐 몸 둘 곳이 없으면 몇만(萬) 청중(聽衆) 앞에서 거꾸러져도 좋겠소. 내가 화가(畫家)가 된다면 「퓌비드샤반」처럼 고리삭고 「밀레이」처럼 유한(悠閑)한 그림은 마음이 간지러워서 못 그리겠소. 뭉툭하고 굵다란 선(線)이 살아서 구름 속 용(龍)같이 꿈틀거리는 「반·고흐」의 필력(筆力)을 빌어 나와 내 친구의 얼굴을 그리고 싶소. 꺼멓고 시뻘건 원색(原色)만 써서 우리의 사는 꼴을 그려는 보아도, 대대손손(代代孫孫)이 전(傳)하여 보여주고 싶지는 않소. 그 그림은 한칼로 찢어버리기를 바라는 까닭에...... 무엇이 되든지 내 생명(生命)의 한 토막을 짧고 굵다랗게 태워버리고 싶소! 1932.10.8

주석

제금가(提琴家) '제금(提琴)'은 바이올린의 한자어. 곧 바이올린 연주자.

High C 남성 고음 성악에서 한계로 꼽히는 높은음 '도'. 뛰어난 성량과 기교를 상징한다.

카루소 엔리코 카루소. 20세기 초 세계를 풍미한 이탈리아의 전설적 테너 성악가.

샬랴핀 표도르 샬랴핀. 깊고 우렁찬 음색으로 이름난 러시아의 베이스 성악가.

영탄(咏嘆) 감정이 북받쳐 길게 소리 내어 읊거나 탄식함.

퓌비드샤반 피에르 퓌비 드 샤반. 차분하고 고전적인 벽화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시인은 그 화풍을 '케케묵었다'고 본다. (원문의 '피아드리'는 표기 와전으로 보임)

밀레이 존 에버렛 밀레이. 섬세하고 한가로운 화풍의 영국 라파엘전파 화가.

고리삭다 젊은이답지 않게 성미가 노숙하고 답답하다. 여기서는 그림이 케케묵고 활기 없음을 이른다.

유한(悠閑)하다 여유롭고 한가하다.

반·고흐 빈센트 반 고흐. 굵고 강렬한 선과 원색으로 격정을 표현한 네덜란드 화가.

심상·해설

가느다란 줄 대신 피를 토하듯 우렁찬 노래를, 한가로운 그림 대신 고흐처럼 굵고 시뻘건 선으로 우리 사는 꼴을 그리겠다며, 짧아도 굵게 타오르고 싶은 예술가의 격정이 들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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