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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 함락
1940-1950년대

싱가폴 함락

노천명 · 1940-1950년대
아시아의 세기적인 여명은 왔다 영미(英米)의 독아(毒牙)에서 일본군은 마침내 싱가폴을 뺏아내고야 말았다 동양 침략의 근거지 온갖 죄악이 음모되는 불야의 성 싱가폴이 불의 세례를 받는 이 장엄한 최후의 저녁 싱가폴 구석구석의 작고 큰 사원들아 너의 피 빨아먹고 넘어지는 영미(英米)를 조상(弔喪)하는 만종을 울려라 얼마나 기다렸던 아침이냐 동아민족은 다같이 고대했던 날이냐 오랜 압제 우리들의 쓰라린 추억이 새롭다 일본의 태양이 한번 밝게 비치니 죄악의 몸뚱이를 어둠의 그늘 속으로 끌고 들어가며 신음하는 저 영미(英米)를 웃어줘라 점잖은 신사풍을 하고 가장 교활한 족속이며 네 이름 영미(英米)다 너는 신사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상을 해적으로 모신 너는 같은 해적이다 쌓이고 쌓인 양키들의 굴욕과 압박 아래 그 큰 눈에는 의혹이 가득히 깃들여졌고 눈물이 핑 돌면 차라리 병적으로 선웃음을 쳐버리는 남양의 슬픈 형제들이여 대동아의 공영권이 건설되는 이날 남양의 구석구석에서 앵글로색슨을 내모는 이 아침 우리들이 내놓는 정다운 손길을 잡아라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에 일장기가 나부끼고 있는 한 너희는 평화스러우리 영원히 자유스러우리 얼굴이 검은 친구여 머리에 터번을 두른 형제여 잔을 들자 우리 방언을 서로 모르는 채 통하는 마음 굳게 뭉쳐지는 마음과 마음 종려나무 그늘 아래 횃불을 질러라 낙타등에 바리바리 술을 실어 오라 우리 이날을 유쾌히 기념하자

주석

싱가폴 함락 1942년 2월 일본군의 싱가포르 점령. 이 시는 그 사건을 '아시아의 여명'으로 찬양한다.

독아(毒牙) 독이 있는 어금니. 비유적으로 남을 해치려는 악독한 수단이나 마수(魔手)를 뜻한다.

불야(不夜)의 성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성, 곧 불야성. 번화하고 향락적인 도시를 이른다.

만종(晩鐘) 저녁때 치는 종. 여기서는 영미를 조문하는 조종(弔鐘)의 뜻으로 쓰였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일본이 아시아를 자국 중심으로 통합하려 내세운 침략 이념. 이 시의 핵심 선전 구호다.

친일시 일본군의 싱가포르 점령과 대동아공영권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고 영미를 '해적'으로 비방한 작품으로, 노천명의 대표적 친일시로 꼽힌다.

심상·해설

불의 세례를 받는 싱가포르의 밤을 배경으로 영미를 '해적'이라 비방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는 격렬한 선전시. 터번 두른 형제와 횃불·낙타의 이국적 이미지로 점철된 노천명의 대표적 친일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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