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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따님
1920년대

북방의 따님

김억 · 1920년대
맑은 물결 흘러드는 황포(黃浦)의 고요한 바닷가에 목숨을 받아, 푸른 언덕의 어린 풀잎 아래서 남모르게 나는 자라난 따님이노라. 떠도는 갈매기의 높게도 노래하는 높았다 낮았다 물결치는 벼랑가의 바람에 나부끼는 해당화의 향 꽃 아래서 어린 꿈을 혼자 깔고 누웠던 따님이었노라. 빛나던 새벽별이 이지러지며, 첫 봄철의 아침볕이 곱게 빛날 때, 돋아나는 잔 풀밭의 첫 이슬을 밟으며 어린 나물과 피어나는 꽃도 뜯었노라. 거칠은 곡조를 번갈아 바꾸어 부르며 양인 듯 무리지어 다니는 흰 돛의 배를 이른 아침 늦은 저녁에 혼자 보면서 즐거운 내 여름을 꿈으로 보내었노라. 아름다운 세상의 아름다운 가슴에는 아름다운 따님의 설움도 숨어 있어라. 고요한 늦은 가을의 낙엽을 밟으며 동무 찾는 내 노래야 섧지 않으랴. 애닯기도 하여라 북방의 겨울이여, 바다는 얼어붙어 물결이 끊기고 흰 눈은 내려 푸른 풀밭을 덮어서 한때 한철의 즐거움은 자취조차 없어라. 목숨은 짧으나 사랑은 길어라, 흰 옷에 검은 머리 드리운 나의 이 몸은 언제 벌써 이 세상의 아름다운 사랑에 얄밉게도 목숨과 맘을 바치고 말았어라. 사람아, 누가 고운 따님의 가슴을 알으랴, 살기도 사랑으로 죽기도 사랑으로, 처음과 끝을 한길 같은 사랑의 목숨에 매달리어 죽으려는 참맘을 누가 알으랴. 사람아, 누가 꿈에나마 알 수 있으랴, 하늘 눈을 울리어 눈물 짓는 사나이의 흐르는 맘은 때때마다 달라지지 않는가, 아아 믿지 말아라. 사랑을 말아라. 맑던 하늘은 갑자기도 흐리어, 뜻도 아닌 소낙비는 땅을 덮게 되어라, 아아 따님아, 웃으면서 우는 따님아, 맑은 하늘인 맘을 믿으려고 말아라. 넘어가는 저녁볕이 구름을 붉히는 가을의 소곤거리는 바람이 하소연할 때, 남녘 서울로 멀리 떠난 나의 벗에게 얼마나 고요케도 나의 꿈을 보냈노. 어디나 한길같이 쌓인 같은 흰 눈에 영구히 깊이 잠든 맘의 그믐밤, 생각은 있어 비록 날아간다 하여도 아아 북방의 외로운 따님의 가슴이야 어찌하랴. 생각에서 생각으로 빗기어 나는 뜨겁고도 곱다란 곡조는 있으나 그것을 그려낼 말과 글은 없어, 내 가슴의 곡조에 울어줄 반향(反響)은 바이없어라. 맑은 물결 흘러드는 황포(黃浦)의 고요한 바닷가에 목숨을 받아, 푸른 언덕의 어린 풀잎 아래서 남모르게 나는 자라난 따님이노라.

주석

황포(黃浦) 누런 물결이 흘러드는 갯벌이나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 시 속 따님이 태어나 자란 북방 바닷가의 배경이다.

해당화 바닷가 모래땅에 붉게 피는 장미과의 꽃. 북방 해안 정서를 대표하는 소재로 쓰였다.

반향(反響) 소리가 부딪쳐 되울려 오는 메아리. 여기서는 내 마음의 곡조에 화답해 줄 공명(共鳴)을 뜻한다.

심상·해설

황포 바닷가에서 해당화 향기 맡으며 자란 북방 처녀의 한 생애가 사계절을 따라 흐르고, 사랑에 목숨을 바친 그녀의 설움이 눈 덮인 겨울 바다처럼 깊고 외롭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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