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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올 때마다
1920년대

눈 올 때마다

김억 · 1920년대
하얀 눈 볼 때마다 다시금 생각나네 어린적 겨울 밤에 옛날 듣던 이야기. 송이 송이 흰 눈은 산(山)과 들에 퍼 불제 다스한 자리속에 찬 세상(世相)도 모르고―. 산(山)에는 신령(神靈)있고 물에는 용왕(龍王)님이 다같이 맡은 세상(世上) 고로이 다스리매 귀(貴)여워라, 산(山)새는 노래로 공중(空中) 날고 고기는 넓은 바다 맘대로 헴치느니. 같은 해 고은 달을 이 인생(人生) 즐길 것이 하늘에 홀로 계신 전능(全能)하신 하느님 모두다 살피시며 죄(罪)와 벌(罰) 나리시매 세상(世上)은 평화(平和)스레 이렇듯 일없느니. 집을 떠나 몇해나 이 세상(世上) 헤맸던가, 거울 보니 아니라 얼굴도 주름 졌네 까닭스런 세고(世苦)에 부대낀 탓이런가 나는 지금(只今) 비로소 이 인생(人生)을 묻노라. 산신령(山神靈)과 용왕(龍王)님 어디로 도망가니 전능(全能)한 하느님도 본색(本色)이 드러났네, 빈 하늘 내 천지(天地)라 비행기(飛行機) 높이 날 제 이 지상(地上) 볼지어다 하루나 평안(平安)한가. 시퍼런 하늘 오늘도 눈 기색(氣色)은 도는데 늙으신 어머님은 손자(孫子)를 데리시고 북방(北邦)의 같은 겨울 눈 쌓인 칩은 밤에 아직도 그 이야기 되풀이 하실런고.

주석

세상(世相) 세상의 모습, 세태(世態)를 뜻하는 한자어.

용왕(龍王) 물을 다스린다고 믿어진 바다·강의 신. 민간신앙의 수신(水神).

세고(世苦) 세상살이의 괴로움, 인생의 고통.

북방(北邦) 북쪽 지방. 시인 김억의 고향인 평안북도 일대를 가리킨다.

심상·해설

함박눈이 산과 들을 덮는 겨울밤, 따스한 아랫목에서 어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가 떠오른다. 신령과 하느님이 사라지고 비행기가 나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 눈 쌓인 북방의 밤을 그리는 쓸쓸한 회상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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