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절정
석벽에는
주사가 찍혀 있오.
이슬 같은 물이 흐르오.
나래 붉은 새가
위태한데 앉어 따먹으오.
산포도순이 지나갔오.
향그런 꽃뱀이
고원꿈에 옴치고 있오.
거대한 죽엄 같은 장엄한 이마,
기휴조가 첫 번 돌아오는 곳,
상현달이 사러지는 곳,
쌍무지개 다리 드디는 곳,
아래서 볼 때 오리온 성좌와 키가 나란하오.
나는 이제 상상봉에 섰오.
별만한 흰꽃이 하늘대오.
민들레 같은 두다리 간조롱해지오.
해솟아 오르는 동해-
바람에 향하는 먼 기폭처럼
뺨에 나부끼오.
주석
주사(朱沙/朱砂) 붉은빛의 광물(진사). 돌벼랑에 붉게 박힌 빛깔을 가리킴.
기휴조(歸休鳥) 철 따라 돌아와 깃들이는 새. '돌아와 쉬는 새', 곧 철새를 뜻함.
상현달 음력 7~8일경 오른쪽 반이 밝은 반달.
상상봉(上上峰) 가장 높은 봉우리. 최정상.
기폭(旗幅) 깃발의 폭, 곧 펄럭이는 깃발.
심상·해설
주사가 박힌 돌벼랑과 향기로운 꽃뱀이 깃든 고원의 정상에서, 오리온 별자리와 키를 나란히 한 채 해 솟는 동해를 향해 깃발처럼 뺨을 나부끼는 장엄하고 황홀한 절정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