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역천
이 때야말로 이 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
더구나 그림도 같고 꿈과도 같은 좋은 밤이다
초가을 열 나흘 밤 옅푸른 유리로 천정(天井)을 한 밤
거기서 달은 마중 왔다 얼굴을 쳐들고 별은 기다린다 눈짓을 한다
그리고 실낱같은 바람은 길을 끌어 바래노라 이따금 성화를 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오늘밤에 좋아라 가고프지가 않다
아니다 나는 오늘밤에 좋아라 보고프지도 않다.
이런 때 이런 밤 이 나라까지 복지게 보이는 저편 하늘을
햇살이 못 쪼이는 그 땅에 나서 가슴 밑바닥으로 못 웃어 본 나는 선뜻만 보아도
철모르는 나의 마음 홀아비 자식 아비를 따르듯 불 본 나비가 되어
꾀우는 얼굴과 같은 달에게로 웃는 잇발 같은 별에게로
앞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곤두치듯 줄달음질을 쳐서 가더니.
그리하여 지금 내가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 짓을 하는지
그것조차 잊고서도 낮이나 밤이나 노닐 것이 두려웁다.
걸림없이 사는 듯하면서도 걸림뿐인 사람의 세상―
아름다운 때가 오면 아름다운 그 때와 어울려 한 뭉텅이가 못 되지는 이 사리―
꿈과도 같고 그림 같고 어린이 마음 위와 같은 나라가 있어
아무리 불러도 멋대로 못 가고 생각조차 못 하게 지쳤을 떠는 이 설움
벙어리 같은 이 아픈 설움이 칡넝쿨같이 몇 날 몇 해나 얽히어 틀어진다.
보아라 오늘밤에 하늘이 사람 배반하는 줄 알았다
아니다 오늘밤에 사람이 하늘 배반하는 줄도 알았다.
주석
역천(逆天) 하늘을 거스름. 아름다운 가을밤(하늘)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등져야 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역설적 처지를 제목으로 삼았다.
열 나흘 밤 음력 열나흗날 밤. 보름 하루 전, 달이 거의 둥글게 차오른 밝은 밤을 가리킨다.
복지게 '복되게'의 옛 표현. 복스럽고 풍요로워 보이는 모양을 뜻한다.
잇발 / 잇바디 이가 죽 늘어선 모양(치열). 별이 반짝이는 모습을 환히 웃는 잇바디에 빗댔다.
사리 '살이·삶'을 뜻하는 옛말. 아름다운 때와도 하나 되지 못하는 화자의 삶을 가리킨다.
햇살이 못 쪼이는 그 땅 빛이 들지 않는 땅, 곧 빼앗긴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상징한다.
심상·해설
그림 같고 꿈 같은 초가을 보름 전야, 달과 별이 손짓하건만 햇살 못 드는 땅에 난 화자는 그 아름다움을 끝내 누리지 못한다. 칡넝쿨처럼 얽힌 설움 속에서 하늘과 사람이 서로 등지는 비극적 자각이 밤하늘에 사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