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깁슨
1930년대

깁슨

박용철 · 1930년대
인물 류벤 • 애플비 …… 직업 잃은 젊은 노동자 쩨시 • 애플비 …… 그의 아내 피—터 닉슨 …… 돌 깨는 노동자 류—벤 • 애플비와 그의 아내가 한길가 울 밑에 앉았다 류—벤은 빵과 치즈를 먹고 쩨시는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다 [류벤] 「장가를 들었어!」 찬찬히 나를 들여다보며 그자가 하는 말이 「자네 같은 어린 사람이!」 나는 공손히 대답하기를 「그리 어린 것도 아닙니다 열아홉이 벌써 났습니다」 「열아홉!」 그러며 그자가 웃습디다 「자네가 남편이고 먹여 살릴 여편네가 있어 마누라가 있다니 한 집을 거느린 셈일세나!」 「어린애도 하나 있답니다」 「애기! 자네가 아직 바로 애긴데 무슨 권리로 장가를 들었다 그래 할 수 없는 새끼 하나를 세상 구경을 시켜가지고 굶주리다 비럭질하다 도적질을 하게 하나?」 이 말을 마치고는 자기 어린애 손을 잡고 저편으로 가버리데나 받은 돈으로 그 녀석 뒤통수를 갈기고 싶데마는 벌써 얻은 돈이고 그리고 배는 고프고 그리고 임자가 주린 줄도 알고 어린애는 우유를 얻어먹여야 할 것이니. 「무슨 권리」라 팽개를 쳐서 그저…………………… [쩨시] 그러면 우리 애기 목숨을 팽개친 셈이 되게 [류벤] 아 • 여보 나도 그 생각에, 그리고 임자를 생각고 그만두었다오 그래 그 십 전짜리를 집어서 빵하고 치즈하고 우유를 샀오그려 [쩨시] 때맞춰서 가지고 왔기에 말이지 애기는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는데 안고 있어도 햇슥해져서 꼼짝 않고 나는 놀랬더라우 [류벤] 배도 무척 고팠으리라, 임자. [쩨시] 아주 죽을 뻔했어 애기를 안아줄 힘이나 있어야지 애기는 가볍지마는 말라서 가볍지마는 내려놓으면 울음이 터지고, 차마 견딜 수가 없어서…… [류벤] 애기는 인저 아무렇지도 않소 물고기같이 꼴딱꼴딱 마시네나 우유를 먹으면 도로 살이 오르지 헌데 임자는 아무것도 아니 먹소 [쩨시] 못 먹겠어 [류벤] 못 먹긴 왜? [쩨시] 지금은 못 먹겠어 [류벤] 쩨시! 먹어야 돼 배가 고파 아주 죽으리다. [쩨시] 지금은 배도 고프잖고 거저 고달퍼서. 아마 너무 걸어서… [류벤] 무슨 권리로 내가 장가를 들어! 저는 무슨 권리로 저도 계집과 자식을 가진 놈이 날더러 그따위 수작을 한담 그놈의 돈을 팽개쳐서……! [쩨시] 아니 임자 그런 사람 생각을 해서 부디 속을 썩이지 말우 임자더러 아무런 말을 했기로서니 인제 다 지난 일이고 애기는 배가 부르잖았소 [류벤] 그자의 돈으로 우유를 샀지 그리고 빵하고 치즈까지 [쩨시] 그래도 맛은 있지 않습디까 임자도 맛있게 먹는구려 [류벤] 그야 좋긴 좋아 그러나 무슨 음식이고 굶주린 끝에는 맛이 있는 게야 그뿐이랴 애써 얻은 것이고 [쩨시] 임자가 애써 얻은 것인데 왜 그걸 그 사람 돈이라고 하오 [류벤] 그야 그렇지 임자 그런데 아무것도 안 먹어 [쩨시] 안 먹혀요 [류벤] 어디 참 될 말인가 어제 우리 모양으로 뱃속에 든 것이란 조금 없이 온종일 투벅거려 길을 걷고 그래 밤이 들어서는 집 볏늘 아래 은신을 하다니 드러누워 이런저런 생각만― 너무 춥고 곤해서 잠은 안 들고― 거저 누워 생각만― 내일이나 되면 무슨 먹을 것 마실 것이 생길까 하고 우리 잠자리 삼은 풀이라도 먹는 짐승들 신세를 외려 부러워하면서 그렇지만 어려운 길을 걷고 나서는 누워 쉬는 것이 제일이야 임자도 매우 단단하지 꽤 기운 있게 어려운 길을 걸었지 [쩨시] 그렇지만 거꾸러질 뻔도 했어요 밤되기 전에 애기를 우유 얻어 먹일 생각이 아니더면 [류벤] 불쌍한 애기! 하루 종일 울어서 내 옷소매가 눈물에 착실히 젖었댔어 [쩨시] 어렵고 먼 길이어 [류벤] 가난한 사람의 가야 할 길은 어렵고 먼 길이라오 [쩨시] 참말, 그러고 끝은 [류벤] 끝이오? 끝이 어딘 줄이야 누가 아오 (한참 있다가) 여보, 아까 그이 말이 옳소 나는 결혼할 권리가 없댔오 아내를 얻고 아이를 낳을 권리가 [쩨시] 그건 또 무슨 소리오 여보 당신은 내가 싫어졌나 보오 [류벤] 아니 여보 그럴 리야…… 그렇지만 그이 말이 옳소 전에 나는 그렇듯이 생각을 해본 일이 없오 이런 생각을 앞으로 해볼 리도 없오 그이 말이 아니더면…… 나는 생각이 모자랐어. 그러나 이제 보면! 나는 결혼할 권리도 없댔어 또 아이를 낳을…… [쩨시] 당신 아이를 사랑하잖소? [류벤] 사랑이라니…… 그 애가 굶주리는 것을 볼 수가 없오. 나는 권리가 없댔어…… 그렇지만 우리가 결혼할 때는 무엇이 모두 이렇지는 않았어 쩨시. 나는 매주 받는 삯이 있어 먹고 살 만은 했고 아내를 얻어 살 만도 하고 우리는 둘이 한 집에서 행복스리 살았오 여보 그렇지 않았오? [쩨시] 참말 행복스러웠어! 류—벤 [류벤] 거기다 아이가 생겨서 우리는 더욱 행복스러웠지. 이걸 미리 아는 수야 누가 있오? 나쁜 시절이 앞에 닥쳐와서 할 일이 차차 줄고 공장이 모두 문을 닫고 우리는 집도 뭣도 없이 몰려나서 할 일이라고는 이렇게 먼 길을 걸어서 다른 데 가 일자리를 구하는 수밖에 일자리 찾기도 여간 오래요…… 정말 그이 말이 옳아…… 내가 무슨 권리로…… [쩨시] 여보 류—벤 어리석은 소리 마오 굶어서 당신은 정신이 흐린가 보오 뱃속이 비면 머릿속도 빈답디다. 쓸데없는 소리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두지 가난한 사람이야 어디 그럴 틈이 있오? 그리고 그런 빈 소리가 나는 듣기 싫소 [류벤] 아니 여보, 이게 왜 빈 소리요? 참말이오, 괴로운 참말이오 우리는 길 위에서 살지 않소 나하고 굶주린 아내하고 아기하고 그런데 그게 참말이 아니오? [쩨시] 아니오 여보 여길 보오 아기는 우유를 다 먹고 아주 단잠이 들었오. [류벤] 허나 당신은 병이 났오 [쩨시] 병? 아니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류벤] 아니 당신은 병이 나서 먹지를 못하오 [쩨시] 거저 고단해서 그렇지오 이제 당신이 먹다 좀 남겨 주면 나도 곧 먹으리다. 보오 이렇게 잘 먹지 [류벤] 나는 권리가 없댔어…… [쩨시]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류벤] 그거야 새삼스레…… [쩨시] 누가 아오 당신 말이 하도 이상하니 장가들 권리가 없다는 둥…… 그럼 왜 나와 결혼을 했소? [류벤] 그렇지 아니할 수가 없어서 임자 없이 살아갈 수가 있었나. 생각은 미처 않았지…… 생각을 할 수 있나 그렇게 임자 때메 정신이 없을 땐데 [쩨시] 그래도 권리가 없소? [류벤] 권리! 권리란 생각을 어찌 해보오? 나는 당신 생각밖에 없댔오 여보 참말 나는 생각이란 아니했오 거저 알았지 당신이 있어야 나는 산다고 [쩨시] 당신은 나를 사랑했지오…… 그런데, 사랑이 권리가 못 되오? 무슨 권리가 따로 있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싫증이 났오 아내와 아들에게? 불쌍한 아기야 인저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치 않는단다 [류벤] 아니 여보 새삼스런 소리를…… (피터 닉슨, 노역에 마르고 허리 굽은 중년이나 된 사내 그 길로 천천히 걸어온다 돌 부수는 마치를 어깨에 메고. 류—벤과 쩨시를 지나다 얼핏 본다 머뭇거리다 돌쳐서서 둘에게로 온다) [피터] 여보, 두 분 아침이 좋소! 당신은 혹시 일자리를 구하지 않소? 그럼! 저기 저 건너 돌 깨는 데가 있소 나는 지금 막 가려는 길인데 그러나 나는 늙은 사람이고 또 좀 게을러서. 당신은 아주 젊은 양반이고 일을 꺼리지는 않겠오 일꾼은 손을 보면 대강 알지오 저 일을 하면 여보, 젊은이 한 실링(오십 전)이 생기오 사람이 먹고 살려면 돌 깨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 하고 많소 당신이 일을 하면 나는 그동안 잠을 한숨 둘르고 싶소 혹시 한나절 내리 잘지도 모르겠오 내야 늙고 게으른 놈이래서. 무어 그렇지만 고마워할 것은 없오 나는 늙은 사람이고 아내도 어린것도 없오 그러하니 그 품삯이 꼭 있어야 할 것도 아니오 그러나 당신은 젊은 터고 그것을 벌어야 되지 않소 나는 곁에 앉아서 당신을 시키고 당신 일하는 구경이나 하겠오 늙고 게으른 사람이 돼서 남 일하는 데 구경하는 것이 재미요 어쩌면 잠깐 눈을 붙일 터이지마는 내가 아주 자는 줄 알았다는 당신 아주 혼이 나리다. 걱정 마오! 벌이를 시켜 드릴 테니 그 돈을 벌려면 당신도 땀을 흘려야 되지오, 너무 몸을 아껴서, 점잖아서 일을 하기 싫은 것만 아니면 그렇잖지? 자! 돌 무더기는 저기 저 돌아가는 모퉁이오 아! 애기 참 예쁘다 나는 어린것이 없오 부인. 위해서 쓸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늙은 사람이 돈이 있기로 무얼 하오 게으르고 아무 쓸데없고 고적한 늙은이가?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그 길 굽이를 돌아간다) ―(끝)―

주석

깁슨 영국 시인 윌프리드 윌슨 깁슨(Wilfrid Wilson Gibson). 노동자와 빈민의 삶을 극적 대화로 그린 시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박용철이 옮긴 극시(劇詩) 번역이다.

실링(shilling) 영국의 옛 화폐 단위. 본문에서는 '오십 전'으로 환산해 풀이하고 있다.

마치 돌을 깨는 데 쓰는 묵직한 망치.

볏늘(낟가리) 베어 묶은 곡식이나 볏단을 쌓아 둔 더미. 노숙하는 부부가 그 아래 몸을 숨겼다는 뜻이다.

심상·해설

일자리를 잃고 아기를 안은 채 길가에 주저앉은 젊은 부부가 한 조각 빵과 우유를 나누며 '결혼할 권리'를 곱씹는데, 자식도 없는 늙은 노동자가 제 일자리를 선뜻 내어주는 장면이 가난 속의 연민을 짙게 드러낸다.

박용철의 다른 작품

비슷한 심상의 다른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