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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다고
1920년대

비를 다고

이상화 · 1920년대
사람만 더러워질 줄로 알았더니 필경에는 믿고 믿던 하늘까지 더러워졌다. 보리가 팔을 벌리고 달라다가 달라다가 이제는 고라진 몸으로 목을 대자나 빠뜨리고 섰구나! 반갑지도 않은 바람만 냅다 불어 가엾게도 우리 보리가 달증이 든 듯이 노랗다 풀을 뽑느니 이장에 손을 대 보느니 하는 것도 이제는 헛일을 하는가 싶어 맥이 풀려만진다! 거름이야 죽을 판 살 판 거두어 두었지만 비가 안 왔어― 원수ㅅ 놈의 비가 오지 않았어 보리는 벌써 목이 말라 입에 대지도 않는다 이렇게 한 장 동안만 더 간다면 그만― 그만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로구나! 하늘아 한 해 열두 달 남의 일 해 주고 겨우 사는 이 목숨이 고라 죽으면 네 맘에 시원할 게 뭐란 말이냐 제―발 빌자! 밭에서 갈잎 소리가 나기 전에 무슨 수가 나 주어야 올해는 그대로 살아나 가 보세! 더러운 사람 놈의 세상에 몹쓸 팔자를 타고 났지 살도 죽도 못해 잘난 이 짓을 대대로 하는 줄은 하늘아! 네가 말은 안 해도 짐작이야 못 했겠나 보리도 우리도 오장이 다 탄다 이러지 말고 비를 다오! ―1925 봄 작(作)―

주석

고라진 / 고라 죽으면 기본형 '고라지다'. 곡식이 가물어 시들고 말라 죽어 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달증 식물이 가뭄·병으로 누렇게 뜨고 마르는 증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장 여기서는 밭을 매만지고 손질하는 일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갈잎 소리 바싹 마른 잎이 바람에 부스럭거리는 소리. 곡식이 다 말라 죽었음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다.

오장(五臟) 간·심장·비장·폐·신장의 다섯 내장. '오장이 탄다'는 속이 바싹 타들어 갈 만큼 애가 탄다는 뜻이다.

심상·해설

비 한 방울 없는 봄 가뭄에 보리가 노랗게 말라 죽어 가고, 남의 일로 겨우 연명하는 농부는 타들어 가는 오장으로 하늘에 비를 내려 달라 절규한다. 메마른 밭과 농민의 한이 함께 갈라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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