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찬벽
내 병상(病床)에 기대었음을 잊고
가을 볕 작은 남창 밖으로
뭇 행열의 뒤를 따라 거리를 돌던 내 영혼
밤이면 어둠을 가슴에 안고
회백색(灰白色)의 찬 벽을 다시 대하나니.
내 얼굴 벽에 비칠 리 없거니와
손톱을 새긴 글자조차 아무런 의미를 두지 못할 뿐
조그만한 이 침대가 나의 현재를 정규(定規)하는 한(限)나
는 못 나는 새라.
세계의 눈을 끄는 원자탄의 힘으로
영원히 전인류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을까
아—
정치도 전인생(全人生)을 해결 못 하매야.
사랑이 식으면 벌레먹은 장미꽃
결혼은
비극이라기보담 추태다.
어머니의 얼굴도
기억에 희미하거니
···································
···································
가을이 간들 잎사귀 간들
내 다시 무엇 설워하랴!
가을이 가면 오는 추위가 무서울 뿐
그러나 연료도 걱정 안 된다.
벽 하나 격(隔)하여 밖은
나와 다른 세상
내일이면 또 거리 우으로
뛰고뛰고 외치련마는······
조그만한 이 침대 위의 나로 완전히 돌아오는 순간
나는 못 나는 새라
다시 어둠을 가슴에 안고
회백색의 찬 벽을 홀로 대하나니.
주석
회백색(灰白色) 잿빛이 도는 흰색.
정규(定規)하다 정해진 틀로 규정하고 한정함.
원자탄 원자폭탄. 광복 직후의 시대 배경이 반영된 표현이다.
격(隔)하다 사이를 두고 막거나 떨어져 있음.
심상·해설
낮에는 남창 너머 거리를 떠돌던 영혼이 밤이면 병상으로 돌아와, 날지 못하는 새처럼 조그만 침대에 갇혀 잿빛 찬 벽을 홀로 마주하는 병자의 고독한 밤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