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노변애가
1920년대

노변애가

오일도 · 1920년대
밤새껏 저 바람 하늘에 높으니 뒷산에 우수수 감나뭇잎 하나도 안 남았겠다. 계절季節의 조락凋落, 잎잎마다 새빨간 정열情熱의 피를 마을 아이 다 모여서 무난히 밟겠구나. 시간時間 좇아 약속約束할 수 없는 오 ― 나의 파종破鐘아 울적鬱寂의 야공夜空을 이대로 묵수默守할 것가! 구름이 끝 열규熱叫하던 기러기의 한 줄기 울음도 멀리 사라졌다. 푸른 나라로 푸른 나라로 ― 고요한 노변爐邊에 홀로 눈감으니 향수鄕愁의 안개비 자욱히 앞을 적시네. 꿈속같이 아득한 옛날 오 ― 나의 사랑아 너의 유방乳房에서 추방追放된 지 내 이미 오래라. 거친 비바람 먼 사막沙漠의 길을 숨가쁘게 허덕이며 내 심장心臟은 찢어졌다. 가슴에 안은 칼 녹스는 그대로 오 ― 노방路傍의 죽음을 어이 참을 것가! 말없는 냉회冷灰 위에 질서秩序없이 글자를 따라 모든 생각이 떴다 ― 잠겼다 ― 또 떴다. ― 앞으로 흰 눈이 펄펄 산야山野에 나리리라 ― 앞으로 해는 또 저물리라.

주석

조락(凋落) 초목의 잎이 시들어 떨어짐.

파종(破鐘) 깨어진 종. 제구실을 못하는 자신을 비유.

울적(鬱寂) 마음이 답답하고 쓸쓸함.

야공(夜空) 밤하늘.

묵수(默守) 잠자코 지킴. 묵묵히 그대로 지킴.

열규(熱叫) 애타게 부르짖음.

노변(爐邊) 화롯가. 난롯가.

향수(鄕愁)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냉회(冷灰) 불기 없이 차게 식은 재.

노방(路傍) 길가.

심상·해설

잎 다 떨어진 늦가을 밤, 화롯가에 홀로 앉아 깨어진 종과 녹슨 칼을 가슴에 품은 채 식은 재 위로 향수와 비애가 안개비처럼 번지는 장면이 떠오른다.

오일도의 다른 작품

비슷한 심상의 다른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