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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여 어서 나려다오
1920년대

눈이여 어서 나려다오

오일도 · 1920년대
눈이여 어서 나려 다오 저 ─ 황막荒漠한 벌판을 희게 덮어 다오. 차디찬 서리의 독배毒杯에 입술 터지고 무자비無慈悲한 바람 때없이 지나는 잔 칼질 길에 피투성이 낙엽落葉이 가득 쌓인 대지大地의 젖가슴 포오트랩 빛의 상처傷處를. 눈이여 어서 나려 다오 저 ─ 앙상한 앞산을 고이 덮어 다오. 사해死骸의 한지寒枝 위에 까마귀 운다. 금수錦繡의 옷과 청춘靑春의 육체肉體를 다 빼앗기고 한위寒威에 쭈구리는 검은 얼굴을. 눈이여! 퍽퍽 나려 다오 태양太陽이 또 그 위에 빛나리라. 가슴 아픈 옛 기억記憶을 묻어 보내고 싸늘한 현실을 잊고 성역聖域의 새 아침 흰 정토淨土 위에 내 영靈을 내 영靈을 쉬이려는 희원希願이오니.

주석

황막(荒漠) 거칠고 아득하게 넓음.

독배(毒杯) 독이 든 술잔. 여기서는 모진 서리의 시련을 비유.

사해(死骸) 죽은 몸뚱이. 주검.

한지(寒枝) 잎이 다 진 차가운 나뭇가지.

금수(錦繡) 수를 놓은 비단. 화려한 옷을 비유.

한위(寒威) 혹독한 추위의 위세.

성역(聖域) 거룩한 지역. 신성한 땅.

정토(淨土) 불교에서 부처가 사는 깨끗한 세계. 여기서는 눈 덮인 깨끗한 땅을 비유.

희원(希願) 바라고 원함. 간절한 소망.

포오트랩 빛 원문 그대로의 외래어 표기로, 검붉은(자줏빛 도는) 빛깔로 풀이됨.

심상·해설

서리에 찢기고 낙엽으로 피투성이가 된 헐벗은 대지 위에 까마귀가 우는 혹한의 풍경에, 흰 눈이 모든 상처를 덮어 새 아침의 정토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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