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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갑판 위
1900-1910년대

밤 갑판 위

임화 · 1900-1910년대
너른 바다 위엔 새 한 마리 없고, 검은 하늘이 바다를 덮었다.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배는 한 곳에 머물러 흔들리기만 하느냐? 별들이 물결에 부딪혀 알알이 부서지는 밤, 가는 길조차 헤아릴 수 없이 밤은 어둡구나! 그리운 이야 그대가 선 보리밭 우에 제비가 떴다. 깨끗한 눈가엔 이따금 향기론 머리같이 날린다. 좁은 앙가슴이 비둘기처럼 부풀어 올라, 동그란 눈물 속엔 설음이 사무쳤더라. 고향은 물도 좋고, 바다도 맑고, 하늘도 푸르고, 그대 마음씨는 생각할수록 아름답다만, 울음소리 들린다, 가을바람이 부나 보다. 낙동강 가 구포벌 위 갈꽃 나부끼고, 깊은 밤 정거장 등잔이 껌벅인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누이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건넛마을 불들도 반짝이고, 느티나무도 꺼멓고, 앞내도 환하고, 벌레들도 울고, 사람들도 울고, 기어코 오늘밤 또 이민열차가 떠나나보다. 그리운 이야! 기약한 여름도 지나갔다. 밤바람이 서리보다도 얼굴에 차, 벌써 한해 넘어 외방 별 아래 옷깃은 찌들었다. 굶는가, 앓는가, 무사한가? 죽었는가 살았는가도 알 수 없는 청년의 길은 참말 가혹하다. 그대 소식 나는 알 길이 없구나! 어느 누군 사랑엔 입맛도 잃는다더라만, 이 바다 위 그대를 생각함조차 부끄럽다. 물결이 출렁 밀려오고, 밀려가고, 그대는 고향에 자는가? 나는 다시 이 바다 뱃길에 올랐다. 현해(현해) 바다 저쪽 큰 별 하나이 우리의 머리 위를 비칠 뿐,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을 모르는 않는다만, 아아, 우리는 스스로 명령에 순종하는 청년이다.

주석

구포벌 부산 북쪽 낙동강 하류 구포(龜浦) 일대의 들판. 화자의 고향 풍경이다.

이민열차 일제강점기, 살길을 찾아 만주 등지로 떠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열차.

현해(玄海) 현해탄(玄海灘). 한국과 일본 규슈 사이의 바다. 식민지 청년들이 건너던 유학·노동의 길목이다.

심상·해설

캄캄한 밤바다 갑판 위에서 두고 온 고향과 그리운 이를 떠올리며, 떠나는 이민열차와 부서지는 별빛 사이로 청년의 외롭고 가혹한 길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낭독 지시

Style: 어두운 바다처럼 낮고 느리게, 그리운 이를 부를 때만 떨리듯 올렸다가 마지막 행은 다잡듯 단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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