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토막 생각
날마다 불러 가는 아내의 배,
낳는 날부터 돈 들것 꼽아보다가
손가락 못편채로 잠이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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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속에 꼬물거리는 조그만 생명(生命)
「네 대(代)에나 기를 펴고 잘 살아라!」
한 마디 축복(祝福) 밖에 선사할 게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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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소리를 내 어찌 들으리
나이 삼십(三十)에 해논것 없고
물려 줄것이라곤 「선인(鮮人)」밖에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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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사(給仕)의 봉투 속이 부럽던
월급(月給)날도 다시는 안올상 싶다
그나마 실직(失職)하고 스무닷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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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電燈) 끊어 가던날 밤 촛(燭)불 밑에서
나어린 아내 눈물 지며 하는 말
「시골 가 삽시다, 두더지처럼 흙이나 파먹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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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관(五官)으로 며드는 봄
가을 바람인듯 몸서리 쳐진다.
조선(朝鮮) 팔도(八道) 어느 구석에 봄이 왔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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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화로(火爐) 헤집어
담배 꼬토리를 찾아내듯이
식어버린 정열(情熱)을 더듬어 보는 봄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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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獄中)에서 처자(妻子) 잃고
길거리로 미쳐난 머리 긴 친구
밤마다 백화점(百貨店) 기웃거리며 휘파람 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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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술 한잔 내라는걸
주머니 뒤집어 털어 보이고
돌아서니 카페의 붉고 푸른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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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면 신경(神經)도 죽었으련만
알뜰한 신문(新聞)만 펴들면
불끈불끈 주먹이 쥐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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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백년(百年)이나 묵어 구멍 뚫린 고목(古木)에도
가지마다 파릇파릇 새엄이 돋네
뿌리마저 썩지 않은줄이야 파보지 않은들 모르리.
주석
토막 생각 짤막짤막하게 떠오른 단상들을 시조 형식으로 이어 적은 것. '토막'은 도막난 짧은 조각을 뜻한다.
선인(鮮人) 조선 사람. 일제가 조선인을 낮추어 부르던 말이기도 하다.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라곤 식민지 백성이라는 처지뿐이라는 자조.
급사(給仕) 관청이나 회사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사환. 그 봉투(월급)조차 부러울 만큼 시인은 가난했다.
스무닷샛날 음력 또는 그달의 스물닷새째 날. 월급날을 떠올리게 하는 날짜.
오관(五官) 눈·귀·코·혀·살갗의 다섯 감각 기관.
새엄 새로 돋아나는 싹, 새움.
심상·해설
전등마저 끊긴 촛불 밑에서 시골로 가자며 눈물짓는 어린 아내와, 물려줄 것이라곤 식민지 백성이라는 처지뿐인 가난한 가장의 시름이, 끝내 구멍 뚫린 고목에 돋는 새움의 희망과 겹쳐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