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상해의 밤
우중충한 농당(弄堂) 속으로
훈둔 장사 모여들어 딱딱이 칠 때면
두 어깨 웅숭그린 년놈의 떠드는 세상
집집마다 마작(麻雀)판 두드리는 소리에
아편에 취(醉)한 듯 상해(上海)의 밤은 깊어가네.
발 벗은 소녀(少女), 눈먼 늙은이를 이끌며
구슬픈 호궁(胡弓)에 맞춰 부르는 맹강녀(孟姜女) 노래,
애처롭구나 객창(客窓)에 그 소리 창자(腸子)를 끊네.
사마로(四馬路) 오마로(五馬路) 골목 골목엔
「이래양듸」, 「량쾌양듸」 인육(人肉)의 저자
침의(寢衣) 바람으로 숨바꼭질하는 야아지의 콧잔등이엔
매독(梅毒)이 우글우글 악취(惡臭)를 풍기네
집 떠난 젊은이들은 노주(老酒) 잔을 기울여
걷잡을 길 없는 향수(鄕愁)에 한숨이 길고
취(醉)하고 취(醉)하여 뼛속까지 취(醉)하여서는
팔을 뽑아 장검(長劍)인 듯 내두르다가
채관(菜館) 소파에 쓰러지며 통곡(痛哭)을 하네.
어제도 오늘도 산란(散亂)한 혁명(革命)의 꿈자리!
용솟음치는 붉은 피 뿌릴 곳을 찾는
「까오리」 망명객(亡命客)의 심사를 뉘라서 알고
영희원(影戱院)의 샹들리에만 눈물에 젖네.
1920.11
주석
농당(弄堂) 상하이 특유의 골목 안 연립 셋집과 그 골목을 이르는 말(룽탕).
훈둔(혼툰) 얇은 만두피에 고기소를 넣어 끓인 중국식 만둣국(혼툰). 밤거리에서 '딱딱이'를 치며 팔던 음식이다.
호궁(胡弓) 두 줄을 활로 켜는 중국의 찰현악기. 구슬픈 음색이 특징이다.
맹강녀(孟姜女) 노래 만리장성 부역에 끌려가 죽은 남편을 찾아 통곡하니 성벽이 무너졌다는 중국 전설의 여인 맹강녀를 노래한 곡. 이별과 한의 상징이다.
사마로(四馬路)·오마로(五馬路) 옛 상하이의 번화가 거리 이름(쓰마루·우마루). 환락가와 유흥업소가 밀집했던 곳이다.
이래양듸·량쾌양듸 호객하는 중국말을 소리대로 적은 것. 각각 '이리 오세요', '잘 (모셔) 드릴게요' 정도의 뜻으로 풀이된다.
인육(人肉)의 저자 사람의 몸을 사고파는 시장이라는 뜻으로, 매춘이 횡행하는 거리를 가리킨다.
야아지 몸 파는 여자, 매춘부를 이르는 당시의 말.
노주(老酒) 중국의 황주(黃酒). 흔히 데워 마시는 곡주(라오주).
채관(菜館) 중국식 요릿집, 음식점.
까오리 '고려(高麗)'를 중국식으로 읽은 말(가오리)로, 중국에서 조선 사람을 가리키던 호칭. 곧 조선인 망명객 자신을 뜻한다.
영희원(影戱院) 활동사진을 상영하던 곳, 곧 영화관.
심상·해설
마작 소리와 아편, 매춘으로 흥청이는 1920년 상하이의 타락한 밤거리에서, 갈 곳 없는 조선 망명객이 데운 술에 취해 통곡하고 영화관 샹들리에만 그 눈물을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