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북경의 걸인
나에게 무엇을 비는가?
푸른 옷 입은 인방(隣邦)의 걸인(乞人)이여
숨도 크게 못 쉬고 쫓겨오는 내 행색(行色)을 보라,
선불 맞은 어린 짐승이 광야를 헤매는 꼴 같지 않으냐.
정양문(正陽門) 문루(門樓) 위에 아침 햇발을 받아
펄펄 날리는 오색기(五色旗)를 쳐다보라.
네 몸은 비록 헐벗고 굶주렸어도
저 깃발 그늘에서 자라나지 않았는가?
거리거리 병영(兵營)의 유량(嚠喨)한 나팔(喇叭) 소리!
내 평생(平生)엔 한번도 못 들어 보던 소리로구나
호동(胡同) 속에서 채상(菜商)의 외치는 굵다란 목청
너희는 마음껏 소리 질러 보고 살아 왔구나.
저 깃발은 바랬어도 대중화(大中華)의 자랑이 남고
너희 동족(同族)은 늙었어도 「잠든 사자(獅子)」의 위엄(威嚴)이 떨치거니
저다지도 허리를 굽혀 구구(區區)히 무엇을 비는고
천년(千年)이나 만년(萬年)이나 따로 살아온 백성(百姓)이거늘―
때 묻은 너희 남루(襤褸)와 바꾸어 준다면
눈물에 젖은 단벌 주의(周衣)라도 벗어 주지 않으랴
마디마디 사무친 원한을 나눠 준다면
살이라도 저며서 길바닥에 뿌려 주지 않으랴
오오 푸른 옷 입은 북국(北國)의 걸인(乞人)이여!
[호동(胡同)은 골목]
1919.12.
주석
인방(隣邦) 이웃 나라. 여기서는 시인이 망명 중 머문 중국을 가리킨다.
선불 맞은 급소가 아닌 곳에 빗맞은 총알을 맞은. 치명상은 아니나 상처 입어 쫓기는 처지를 비유한다.
정양문(正陽門) 베이징 내성의 정문. 흔히 첸먼(前門)이라 불리는 큰 성문이다.
문루(門樓) 성문 위에 지은 다락집. 망루.
오색기(五色旗) 1912~1928년 중화민국 초기의 국기. 붉은·노란·파란·흰·검은 다섯 색 띠로 한·만·몽·회·장 다섯 민족의 화합을 상징했다.
유량(嚠喨)하다 음악 소리가 맑고 우렁차게 울려 퍼지다.
호동(胡同) 골목. 베이징의 좁은 골목길을 이르는 중국말(후퉁). 본문 주석에 '골목'이라 밝혀져 있다.
채상(菜商) 채소를 파는 장수.
대중화(大中華)·잠든 사자 쇠락했어도 여전히 광대한 중국. '잠든 사자'는 잠재된 힘을 지닌 중국을 가리키는 당대의 표현이다. 나라 잃은 시인이 '제 나라가 있는' 중국 거지를 부러워하는 대비를 이룬다.
주의(周衣) 두루마기. 우리 한복 겉옷.
심상·해설
베이징 성문 위로 제 나라 깃발이 펄럭이는 아침, 구걸하는 중국 거지 앞에서 나라 잃고 쫓겨 온 망명객이 '너는 그래도 깃발 그늘에서 자랐다'며 자신의 더 깊은 비애를 토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