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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씨의 초상
1930년대

R씨의 초상

심훈 · 1930년대
내가 화가(畫家)여서 당신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린다면 지금 십년(十年)만에 대(對)한 당신의 얼굴을 그린다면 채색(彩色)이 없어 팔레트를 들지 못하겠소이다. 화필(畫筆)이 떨려서 획(劃) 하나도 긋지 못하겠소이다. 당신의 얼굴에 저다지 찌들고 바래인 빛깔을 칠할 물감은 쓰리라고 생각도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이마에 수(數) 없이 잡힌 주름살을 그릴 가느다란 붓은 준비(準備)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결 거칠은 황포탄(黃浦灘)에서 생선(生鮮)같이 날뛰던 당신이 고랑을 차고 삼년(三年) 동안이나 그물을 뜨다니 될 뻔이나 한 일입니까 물푸레나무처럼 꿋꿋하고 물오른 버들만치나 싱싱하던 당신이 때아닌 서리를 맞아 가랑잎이 다 될 줄 누가 알았으리까 「이것만 뜯어먹고도 살겠다」던 여덟 팔자(八字) 수염은 흔적(痕迹)도 없이 깎이고 그 터럭에 백발(白髮)까지 섞였습니다그려. 오오 그러나 눈만은 샛별인 듯 전(前)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불똥이 떨어져도 꿈쩍도 아니하던 저 눈만은 살았소이다! 내가 화가(畫家)여서 지금 당신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린다면 백호(百號)나 되는 큰 캔버스에서 저 눈만을 그리겠소이다. 절망(絶望)을 모르고 끝까지 조금도 비관(悲觀)하지 않는 저 형형(炯炯)한 눈동자만을 전신의 힘을 다하여 한 획(劃)으로 그리겠소이다. 1932. 9. 5.

주석

R씨 옥고를 치른 어느 독립운동가·동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름을 머리글자 R로만 밝혀 둔 인물이다.

황포탄(黃浦灘) 중국 상하이를 흐르는 황푸강(黃浦江) 가의 물가. 1920년대 상하이는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지여서, R씨가 그곳에서 활동했음을 짐작게 한다.

고랑을 차고 '쇠고랑(수갑)을 찬다'는 뜻으로, 감옥에 갇혀 옥살이를 했음을 이른다. '그물을 뜨다'는 옥중 노역을 가리킨다.

백호(百號) 그림 화폭의 크기 단위. 100호는 약 162×130cm에 이르는 매우 큰 캔버스다.

형형(炯炯) 눈빛이 날카롭고 빛나는 모양.

심상·해설

옥살이로 폭삭 늙어 버린 옛 동지의 얼굴을 차마 그릴 물감이 없다지만, 불똥에도 꿈쩍 않던 형형한 두 눈만은 여전히 살아 빛난다. 꺾이지 않는 의지를 한 획으로 그려 내려는 비장한 헌사가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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