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적어도 평범한 가운데서는 사물의 정체를 보지 못하며, 관습적 행위에서는 진리를 보다 더 발견할 수 없는 것이 가장 어질다고 하는 우리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여보십시오. 무엇보다도 밤에 깨어서 하늘을 우러러보십시오. 우리는 낮에 보지 못하던 아름다움을, 그곳에서, 볼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파릇한 별들은 오히려 깨어 있어서 애처롭게도 기운 있게도 몸을 떨며 영원을 속삭입니다. 어떤 때는, 새벽에 스러져 가는 오묘한 달빛이, 애틋한 한 조각, 숭엄한 채운(彩雲)의 다정한 치마폭을 빌려, 그의 가련한 한두 줄기 눈물을 문지르기도 합니다. 여보십시오, 여러분. 이런 것들은 작은 일이나마, 우리가 대낮에는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던 것들입니다.
다시 한번, 도회(都會)의 밝음과 지껄임이 그의 문명으로써 광휘와 세력을 다투며 자랑할 때에도, 저, 깊고 어두운 산과 숲의 그늘진 곳에서는 외로운 벌레 한 마리가, 그 무슨 슬픔에 겨웠는지, 쉼 없이 울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벌레 한 마리가 오히려 더 많이 우리 사람의 정조(情操)답지 않으며, 난들에 말라 벌바람에 여위는 갈대 하나가 오히려 아직도 더 가까운, 우리 사람의 무상과 변전(變轉)을 서러워하여 주는 살뜰한 노래의 동무가 아니며, 저 넓고 아득한 난바다의 뛰노는 물결들이 오히려 더 좋은, 우리 사람의 자유를 사랑한다는 계시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고인(故人)은 꿈에서 만나고, 높고 맑은 행적의 거룩한 첫 한 방울의 기도(企圖)의 이슬도 이른 아침 잠자리 위에서 받습니다.
우리는 적막한 가운데서 더욱 사무쳐 오는 환희를 경험하는 것이며, 고독의 안에서 더욱 보드라운 동정을 알 수 있는 것이며, 다시 한번, 슬픔 가운데서야 보다 더 거룩한 선행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며, 어두움의 거울에 비치어 와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보이며, 삶을 좀 더 멀리한, 죽음에 가까운 산마루에 서서야 비로소 사람의 아름다운 손길 닿은 옷이 생명의 봄 두던에 나부끼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곧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나 맘으로는 일상에 보지도 못하며 느끼지도 못하던 것을, 때로는 그것들로는 볼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는 밝음을 지어 버린 어두움의 골방에서며, 삶에서는 좀 더 돌아앉은 죽음의 새벽빛을 받는 바라지 위에서야, 비로소 보기도 하며 느끼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몸보다도 맘보다도 더욱 우리에게 각자의 그림자같이 가깝고 각자에게 있는 그림자같이 반듯한 각자의 영혼이 있습니다. 가장 높이 느낄 수도 있고 가장 높이 깨달을 수도 있는 힘, 때로는 가장 강하게 진동(振動)이 맑게 울리어 오는, 반향과 공명을 항상 잊어버리지 않는 악기, 이는 곧, 모든 물건이 가장 가까이 비치어 들어옴을 받는 거울, 그것들이 모두 다 우리 각자의 영혼의 표상(標像)이라면 표상일 것입니다.
2
그러한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가장 이상적 미(美)의 옷을 입고, 완전한 음률의 발걸음으로 미묘한 절조(節操)의 풍경 많은 길 위를, 정조의 불붙는 산마루로 향하여, 혹은 말의 아름다운 샘물에 심상(心想)의 작은 배를 젓기도 하며, 이끼 돋은 관습의 기험(崎險)한 돌무더기 사이로 추억의 수레를 몰기도 하여, 혹은 동구양류(洞口陽柳)에 춘광(春光)은 아리땁고 십리곡방(十里曲坊)에 풍류는 번화하면 풍표만점(風飄萬點)이 산란한 벽도화(碧桃花) 꽃잎만 흩어지는 우물 속에 즉흥의 두레박을 들이놓기도 할 때에는, 이곳, 이르는 바 시혼(詩魂)으로 그 순간에 우리에게 현현(顯現)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시혼은 물론 경우에 따라 대소심천(大小深淺)을 자재(自在)로 변환하는 것도 아닌 동시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어디까지 불완전한 대로 사람의 있는 말의 정(精)을 다하여 할진대는, 영혼은 산과 유사하다면 할 수도 있습니다. 강과 유사하다면 할 수 있습니다. 초하루 보름 그믐 하늘에 떠오르는 달과도 유사하다면, 별과도 유사하다면, 더욱 유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산보다도 강보다도, 달이나 별보다도, 다시금 그들은 어떤 때에는 반드시 한 번은 없어도 질 것이며 지금도 역시 시시각각으로 적어도 변환되려고 하며 있지마는, 영혼은 절대로 완전한 영원의 존재며 불변의 성형(成形)입니다. 예술로 표현된 영혼은 그 자신의 예술에서, 사업과 행적으로 표현된 영혼은 그 자신의 사업과 행적에서 그의 첫 형체대로 끝끝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혼도 산과도 같으며는 강과도 같으며, 달이나 별과도 같다고 할 수는 있으나, 시혼 역시 본체는 영혼 그것이기 때문에, 그들보다도 오히려 그는 영원의 존재며 불변의 성형일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면 시작품(詩作品)의 우열 또는 이동(異同)에 따라, 같은 한 사람의 시혼일지라도 혹은 변환한 것같이 보일는지도 모르지마는 그것은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 적어도 같은 한 사람의 시혼은 시혼 자신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산과 물과, 혹은 달과 별이 편각(片刻)에 그 형체가 변하지 않음과 마치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작품에는, 그 시상(詩想)의 범위, 리듬의 변화, 또는 그 정조의 명암에 따라, 비록 같은 한 사람의 시작(詩作)이라고는 할지라도, 물론 이동은 생기며 또는 읽는 사람에게는 시작 각개의 인상을 주기도 하며, 시작 자신도 역시 어디까지든지 엄연한 각개로 존립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 마치 산색(山色)과 수면(水面)과 월광성휘(月光星輝)가 모두 다 어떤 한 때의 음영(陰影)에 따라, 그 형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달리 보이도록 함과 같습니다. 물론 그 한 때 한 때의 광경만은 역시 혼동할 수 없는 각개의 광경으로 존립하는 것도, 시작의 그것과 바로 같습니다.
그렇다고, 산색 또는 수면, 혹은 월광성휘가 한 때의 음영에 따라, 때때로, 그것을 완상(翫賞)하는 사람의 눈에 달리 보인다고, 그 산수성월(山水星月)은 산수성월 자신의 형체가 변환된 것이라고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작에도 역시 시혼 자신의 변환으로 말미암아 시작에 이동이 생기며 우열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며 그 사회와 또는 당시 정경(情境)의 여하에 의하여 작자의 심령상(心靈上)에 무시(無時)로 나타나는 음영의 현상이 변환되는 데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겨울에 눈이 왔다고 산 자신이 희어졌다는 사람이 이 어디 있겠으며, 초생이라고 초생달은 달 자신이 구상(鉤狀)이라는 사람이야 어디 있겠으며, 구름이 덮인다고 별 자신이 없어지고 말았다는 사람이야 어디 있겠으며, 모래바닥 강물에 달빛이 비춘다고 혹은 햇볕이 그늘진다고 그 강물이 「얕아졌다」 혹은 「깊어졌다」고 할 사람이야 어디 있겠습니까.
3
여러분. 늦은 봄 삼월 밤, 들에는 물기운 피어오르고, 동산의 잔디밭에 물구슬 맺힐 때, 실실이 늘어진 버드나무 잎새 속에서, 옥반(玉盤)에 금주(金珠)를 굴리는 듯, 높게, 낮게, 또는 번거로이, 또는 삼가는 듯이 우짖는 꾀꼬리 소리를, 소반같이 둥근 달이 등잔같이 밝게 비추는 가운데 망연(茫然)히 서서, 귀를 기울인 적이 없으십니까. 사방을 두루 살펴도 그때에는 그늘진 곳조차 어슴푸레하게, 그러나 곳곳이 이상히도 빛나는 밝음이 살아 있는 것 같으며, 청명한 꾀꼬리 소리에, 호젓한 달빛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보십시오, 그곳에 음영이 없다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호젓이 비추는 달밤의 달빛 아래에는 역시 그에 또 고유한 음영이 있는 것입니다. 지나당(支那唐)의 소자첨(蘇子瞻)의 구(句)에 『적수공명(積水空明)』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이러한 밤, 이러한 광경의 음영을 그려낸 것입니다. 달밤에는, 달밤에 또 고유한 음영이 있고, 청려(淸麗)한 꾀꼬리의 노래에는, 역시 그에 또 상당한 음영이 있는 것입니다. 음영 없는 물체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존재에는 반드시 음영이 따른다고 합니다. 다만 같은 물체일지라도 공간과 시간의 여하에 의하여, 그 음영에 광도(光度)의 강약만은 있을 것입니다. 곧, 음영에 그 심천(深淺)은 있을지라도, 음영이 없기도 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국 시인, 아더 시먼즈의
“Night, and the silence of the night;
In the Venice far away a song;
As if the lyrics water made
Itself a serenade;
As if the waters silence were a song,
Sent up in to the night,
Night a more perfect day,
A day of shadows luminous,
Water and sky at one, at one with Us;
As if the very peace of night,
The older peace than heaven or light,
Came down into the day,”
라는 시도 역시 이러한 밤의, 이러한 광경의 음영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면 시혼은 본래가 영혼 그것인 동시에 자체의 변환은 절대로 없는 것이며, 같은 한 사람의 시혼에서 창조되어 나오는 시작에 우열이 있어도 그 우열은, 시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 음영의 변환에 있는 것이며, 또는 그 음영을 보는 완상자(翫賞者) 각자의 정당한 심미적 안목에서 판별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동탁독산(童濯禿山)의 음영은 낙락장송(落落長松)이 가지 뻗어 틀어지고 청계수(淸溪水)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울울창창(鬱鬱蒼蒼)한 산의 음영보다 미적 가치에 모자랄 것이며, 또는 개이지도 않으며는, 비도 내리지 아니하는 흐릿하고 답답한 날의 음영은 뇌성전광(雷聲電光)이 금시에 번갈아 이르며 대쪽 같은 빗발이 붓듯이 내려 쏟아지는 취우(驟雨)의 여름날의 음영보다 우리에게 쾌감이 적을 것이며, 따라서 삶에 대한 미적 가치도 적은 날일 것입니다.
그러면 시작의 가치 여하는 적어도 시작에 나타난 음영의 가치 여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영의 가치 여하를 식별하기는, 곧, 시작을 비평하기는 지난(至難)의 일인 줄로 생각합니다. 나의 애모하는 사장(師匠), 김억 씨가 졸작 『님의 노래』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내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 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밤들고 잠들도록 귀에 들려요.
고이도 흔들리는 노래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고적(孤寂)한 잠자리에 홀로 누워도
내 잠은 포스근히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 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잊고 말아요.』
를 평하심에, 「너무도 맑아, 밑까지 들여다 보이는 강물과 같은 시다. 그 시혼 자체가 너무 얕다.」고 하시고, 다시 졸작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림자 같은 벗 한 사람이 내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쓸데없는 괴로움으로만 보내었겠습니까!
오늘날은 또다시 당신의 가슴 속, 속 모를 곳을
울면서 나는 휘저어 버리고 떠납니다그려!
허수한 맘, 둘 데 없는 심사에 쓰라린 가슴은
그것이 사랑, 사랑이던 줄이 아니도 잊힙니다.』
를 평하심에, 「시혼과 시상과 리듬이 보조를 가지런히 하여 걸어나아가는 아름다운 시다.」고 하셨다. 여기에 대하여, 나는 첫째로 같은 한 사람의 시혼 자체가 같은 한 사람의 시작에서 금시에 얕아졌다 깊어졌다 할 수 없다는 것과, 또는 시작마다 새로이 별다른 시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누구의 것보다도 자신이 제일 잘 알 수 있는 자기의 시작에 대한, 씨의 비평 한 구절을 일 년 세월이 지난 지금에 비로소, 다시 끄집어 내어다 쓰는 것이며, 둘째로는 두 개의 졸작이 모두 다, 그에 나타난 음영의 점에 있어서도, 역시 각개 특유의 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려 함입니다.
여러분. 위에도 썼거니와, 달밤의 꾀꼬리 소리에도 물소리에도 한결같이 그에 특유한 음영은 대낮의 밝음보다도 야반(夜半)의 어두움보다도 더한 밝음 또는 어두움으로 또는 어스름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을의 새어 가는 새벽, 별빛도 희미하고, 헐벗은 나무 찬비에 추적은 가지조차 어슴푸레한데, 길 넘는 풀숲에서, 가늘게 들려와서는 사람의 구슬픈 심사를 자아내기도 하고 외롭게 또는 하염없이 흐느껴 숨어서는 이름조차 잊어버린 눈물이 수신절부(守臣節婦)의 열두 마디 간장을 끊어도 지게 하는, 귀뚜라미의 울음을 들어 보신 적은 없습니까. 물론 그곳에 나타난 음영이 봄날의 청명한 달밤의 그것보다도 물소리 또는 꾀꼬리 소리의 그것들보다도 더디고 완연한, 얼른 보아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봄의 달밤에 듣는 꾀꼬리의 노래 또는 물노래에서나, 가을의 서리 찬 새벽 우짖는 귀뚜라미의 울음에서나, 비록 완상하는 사람에조차 그 소호(所好)는 다를는지 몰라, 모두 그의 특유한 음영의 미적 가치에 있어서는 결코 우열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다시 한번, 시혼은 직접 시작에 이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영으로써 현현된다는 것과, 또는 현현된 음영의 가치에 대한 우열은, 적어도 그 현현된 정도 및 태도 여하와 형상 여하에 따라 창조되는 각자 특유한 미적 가치에 의하여 판정할 것임을 말하고, 이제는, 이 부끄러울 만큼이나 조그만 논문은 이로써 끝을 짓기로 합니다.
주석
시혼(詩魂) 시를 낳는 정신, 시인의 영혼을 이르는 말. 김소월이 스승 김억의 비평에 답하여 쓴 시론(詩論)의 제목.
현현(顯現) 숨어 있던 것이 겉으로 드러나 나타남.
음영(陰影) 그늘과 그림자. 여기서는 시혼이 작품으로 드러날 때 시대·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빛깔과 명암을 뜻하는 핵심 개념.
동구양류(洞口陽柳) 마을 어귀 양지바른 곳에 늘어선 버드나무.
십리곡방(十里曲坊) 십 리에 걸쳐 굽이진 거리. 번화한 시가지를 이른다.
풍표만점(風飄萬點) 바람에 수많은 꽃잎이 흩날림. 두보의 시 구절에서 온 표현.
벽도화(碧桃花) 복숭아나무의 한 종류로, 봄에 붉은 꽃이 피는 벽도나무의 꽃.
아더 시먼즈(Arthur Symons) 영국의 시인·비평가(1865~1945). 본문에 그의 시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소자첨(蘇子瞻) 중국 송나라의 문호 소식(蘇軾), 곧 소동파. 자첨은 그의 자(字).
적수공명(積水空明) 소동파의 『전적벽부』 등에 보이는 표현으로, 고인 물이 텅 빈 듯 맑게 비치는 정경을 이른다.
동탁독산(童濯禿山) 나무가 없어 헐벗고 민둥민둥한 산.
낙락장송(落落長松) 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진 키 큰 소나무.
취우(驟雨)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 그치는 소나기.
수신절부(守臣節婦) 절개를 지키는 충신과 정절을 지키는 부인. 슬픔이 사무친 사람의 비유로 쓰였다.
김억(金億) 호는 안서(岸曙). 김소월의 스승이자 한국 근대 시단의 선구적 시인·번역가. 이 글에서 소월의 시를 비평한 인물로 등장한다.
사장(師匠) 스승. 학문이나 기예를 가르쳐 주는 어른.
심상·해설
밤하늘의 별빛과 달빛, 봄밤 꾀꼬리와 가을 새벽 귀뚜라미 울음이 자아내는 음영을 통해, 변치 않는 영혼과 시혼의 본질을 명상하게 한다.